열차 화장실 에티켓에 일조한 음악
드보르작의 해학, 유머레스크
유독 더웠던 올여름. 폭염의 일상 속에서 듣고 싶은 클래식을 고르자 치면 긴 호흡의 교향곡보다 쉽게 몰입이 가능한 소품 기악곡에 더 손이 가는건 어찌보면 당연지사. 유머레스크(Humoresque)는 '유머'라는 단어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19세기 유럽에 등장한 변화무쌍하고 해학적인 악상으로 이루어진 자유로운 형식의 소품 기악곡이다.
곡의 타이틀에 이 단어를 처음 도입했던건 독일의 작곡가 슈만이었다. 그는 독일식 유머에 대해 '눈물을 자아내는 웃음'이라고 강조했는데 음악 속에 드러난 그의 탐닉적인 유머 속에 독일식 진지함이 묻어난다. 결코 가볍지 않은 유머레스크란 얘기다.
만약 유머레스크라는 개념에 충실한 유머와 경쾌함을 자아내는 자유로운 형식의 유머레스크를 듣고 싶다면? 안토닌 드보르작(Antonin Dvorak)이 작곡한 8곡의 유머레스크를 1순위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드보르작의 유머레스크 속에도 일말의 슬픔을 담은 악상이 담겨있지만, 슈만의 심오함보다는 낭만성을 띤 보편적인 음악적 텍스트로 봐도 무방하며 기본 바탕은 흥겹다. 대중의 뇌리 속에 각인된 '유머레스크'라는 단어는 직관적으로 드보르작을 떠울리게 하는데 이는 8개의 유머레스크 중 제7번이 가진 가공할 만한 대중성 때문일 터. 7번은 전설적인 바이올리니스트 크라이슬러의 바이올린 편곡 버전을 비롯하여 셀 수 없이 다양한 편곡 버전으로 연주된다. 심지어 한때 미국에서는 "기차역에 기차가 정차하면 화장실 물을 내리지 마세요"라는 메세지를 담은 안내 방송 멘트의 배경음악으로 쓰이며 인기를 누렸다.
그의 유머레스크는 심오한 정서보다는 미국적인 자유분방한 정서, 경쾌함, 낭만이 담겨있다. 1894년 여름 미국을 잠시 떠나 그의 고향 체코를 찾은 드보르작이 1892년부터 미국 국립 콘서바토리의 원장으로 재직하면서 작곡노트에 적어두었던 악상들을 소환하여 피아노를 위한 8개의 소품을 엮은 '유머레스크'를 작곡했다. 드보르작의 유머레스크가 시벨리우스, 차이코프스키를 비롯한 다른 유럽 · 러시아 작곡가들의 유머레스크와 비교해 차별성을 갖는 이유는 미국의 음악적 자양분을 흡수했다는 사실이다.
당시 미국에서 꿈틀대기 시작하며 전파된 흑인 음악의 블루노트, 5음계를 가미하여 미국의 이국적인 정서와 감성을 담았고 체코의 민속 음악과 엮어 유럽적 정서와 함께 버무렸다. 예를 들어 세도막 형식을 갖춘 제4번의 주제는 흑인 음악의 블루스적 요소가 담겨있고 B는 전형적인 폴카 춤곡 캐릭터의 악상으로 A과 대조를 이루며 유머레스크 특유의 위트를 배가시킨다. 제6번 음악 또한 새해 전날 길거리에 모인 뉴요커들이 부르던 노래를 노트에 받아 적어 놓았다가 음악에 차용한 케이스로 미국의 대중적인 감성이 담겨 있다.
기차광이었던 그가 기차 움직임의 리듬을 곡에 담았다는 사실 또한 흥미롭다. 제7번의 반복 리듬이 기차의 움직임 패턴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며 과거 증기기관차의 움직임을 상상하면서 들어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참고로 영화 <죠스>의 테마음악을 떠올리게 하는 신세계 교향곡 4악장의 첫 소절 또한 가속하는 기차의 모습을 담은 음악으로 잘 알려져 있다.
처음 작곡에 착수했을 당시 론도 형식의 '새로운 스코틀랜드 춤곡'이라는 타이틀을 달았으나 계획을 수정, 형식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 유머레스크로 방향을 틀었다는 사실은 춤곡풍의 음악을 자유로운 형식 속에 담고 싶었던 그의 의지에 대한 방증일 것이다.
8곡 총 길이가 20분 남짓, 부담없이 들을 수 있는 러닝 타임 속엔 낭만과 변화무쌍한 아름다움이 가득하다. 드보르작의 유머레스크는 어떠한 사전지식 없이 캐주얼하게 들을 수 있는 명곡으로 잘 알려진 7번 뿐 아니라 총 8곡 모두 들어보길 권한다. 지루할 틈이 없는 버라이어티 한 클래식의 향연이다.
*Youtube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XT73_TD33hA
<필자소개>
아드리엘 김은 오스트리아 빈 국립음대에서 지휘와 바이올린을 전공, 졸업(석사)했으며 도이치 방송 교향악단 부지휘자와 디토 오케스트라 수석지휘자를 역임한바 있다, 현재는 지휘자, 작곡가, 문화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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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 화장실 에티켓에 일조한 음악
드보르작의 해학, 유머레스크
유독 더웠던 올여름. 폭염의 일상 속에서 듣고 싶은 클래식을 고르자 치면 긴 호흡의 교향곡보다 쉽게 몰입이 가능한 소품 기악곡에 더 손이 가는건 어찌보면 당연지사. 유머레스크(Humoresque)는 '유머'라는 단어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19세기 유럽에 등장한 변화무쌍하고 해학적인 악상으로 이루어진 자유로운 형식의 소품 기악곡이다.
곡의 타이틀에 이 단어를 처음 도입했던건 독일의 작곡가 슈만이었다. 그는 독일식 유머에 대해 '눈물을 자아내는 웃음'이라고 강조했는데 음악 속에 드러난 그의 탐닉적인 유머 속에 독일식 진지함이 묻어난다. 결코 가볍지 않은 유머레스크란 얘기다.
만약 유머레스크라는 개념에 충실한 유머와 경쾌함을 자아내는 자유로운 형식의 유머레스크를 듣고 싶다면? 안토닌 드보르작(Antonin Dvorak)이 작곡한 8곡의 유머레스크를 1순위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드보르작의 유머레스크 속에도 일말의 슬픔을 담은 악상이 담겨있지만, 슈만의 심오함보다는 낭만성을 띤 보편적인 음악적 텍스트로 봐도 무방하며 기본 바탕은 흥겹다. 대중의 뇌리 속에 각인된 '유머레스크'라는 단어는 직관적으로 드보르작을 떠울리게 하는데 이는 8개의 유머레스크 중 제7번이 가진 가공할 만한 대중성 때문일 터. 7번은 전설적인 바이올리니스트 크라이슬러의 바이올린 편곡 버전을 비롯하여 셀 수 없이 다양한 편곡 버전으로 연주된다. 심지어 한때 미국에서는 "기차역에 기차가 정차하면 화장실 물을 내리지 마세요"라는 메세지를 담은 안내 방송 멘트의 배경음악으로 쓰이며 인기를 누렸다.
그의 유머레스크는 심오한 정서보다는 미국적인 자유분방한 정서, 경쾌함, 낭만이 담겨있다. 1894년 여름 미국을 잠시 떠나 그의 고향 체코를 찾은 드보르작이 1892년부터 미국 국립 콘서바토리의 원장으로 재직하면서 작곡노트에 적어두었던 악상들을 소환하여 피아노를 위한 8개의 소품을 엮은 '유머레스크'를 작곡했다. 드보르작의 유머레스크가 시벨리우스, 차이코프스키를 비롯한 다른 유럽 · 러시아 작곡가들의 유머레스크와 비교해 차별성을 갖는 이유는 미국의 음악적 자양분을 흡수했다는 사실이다.
당시 미국에서 꿈틀대기 시작하며 전파된 흑인 음악의 블루노트, 5음계를 가미하여 미국의 이국적인 정서와 감성을 담았고 체코의 민속 음악과 엮어 유럽적 정서와 함께 버무렸다. 예를 들어 세도막 형식을 갖춘 제4번의 주제는 흑인 음악의 블루스적 요소가 담겨있고 B는 전형적인 폴카 춤곡 캐릭터의 악상으로 A과 대조를 이루며 유머레스크 특유의 위트를 배가시킨다. 제6번 음악 또한 새해 전날 길거리에 모인 뉴요커들이 부르던 노래를 노트에 받아 적어 놓았다가 음악에 차용한 케이스로 미국의 대중적인 감성이 담겨 있다.
기차광이었던 그가 기차 움직임의 리듬을 곡에 담았다는 사실 또한 흥미롭다. 제7번의 반복 리듬이 기차의 움직임 패턴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며 과거 증기기관차의 움직임을 상상하면서 들어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참고로 영화 <죠스>의 테마음악을 떠올리게 하는 신세계 교향곡 4악장의 첫 소절 또한 가속하는 기차의 모습을 담은 음악으로 잘 알려져 있다.
처음 작곡에 착수했을 당시 론도 형식의 '새로운 스코틀랜드 춤곡'이라는 타이틀을 달았으나 계획을 수정, 형식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 유머레스크로 방향을 틀었다는 사실은 춤곡풍의 음악을 자유로운 형식 속에 담고 싶었던 그의 의지에 대한 방증일 것이다.
8곡 총 길이가 20분 남짓, 부담없이 들을 수 있는 러닝 타임 속엔 낭만과 변화무쌍한 아름다움이 가득하다. 드보르작의 유머레스크는 어떠한 사전지식 없이 캐주얼하게 들을 수 있는 명곡으로 잘 알려진 7번 뿐 아니라 총 8곡 모두 들어보길 권한다. 지루할 틈이 없는 버라이어티 한 클래식의 향연이다.
*Youtube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XT73_TD33hA
<필자소개>
아드리엘 김은 오스트리아 빈 국립음대에서 지휘와 바이올린을 전공, 졸업(석사)했으며 도이치 방송 교향악단 부지휘자와 디토 오케스트라 수석지휘자를 역임한바 있다, 현재는 지휘자, 작곡가, 문화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