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얀의 테스트
1986년,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이하 베를린 필)의 악장으로 이제 막 서른을 넘긴 폴란드 출신의 젊은 바이올리니스트가 선임되었습니다. 그는 1957년부터 1985년까지 거의 30년 동안 이 오케스트라의 악장을 역임한 전설적인 인물, 미셸 슈발베(M. Schwalbé, 1919-2012)의 후임이었지요. 그런데, 그가 본격적으로 악장의 역할을 시작하기도 전에 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당시 베를린 필의 상임 지휘자였던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H. v. Karajan, 1908-1989)이 그를 악장으로 선임한 오케스트라의 결정에 반대하고 나선 것이었지요. 카라얀은 오케스트라에 “만일 이 바이올리니스트가 악장 자리에 앉는다면, 나는 즉시 떠날 것”이라는 강경한 어조의 전보를 보냈습니다. 1980년대 초반 클라리네티스트 자비네 마이어(S. Meyer, 1959- )의 수석 연주자 선임 문제를 놓고 본격적으로 불거져 나온 카라얀과 베를린 필의 갈등은 점차 증폭되어서, 1980년대 중반 양측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습니다. 카라얀은 당시 새 단원을 선발하는 오디션도 신경쓰지 않았지요. 아마도 카라얀은 악장 오디션에 참석하지 않았다가 뒤늦게 새 악장을 반대한다는 입장을 내놓았던 듯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관계가 좋지 않다고 해도 카라얀은 종신 상임지휘자로서 베를린 필을 30여년 동안 이끌어 오고 있었으니, 오케스트라는 카라얀의 입장을 무시할 수 없었지요. 오케스트라 측은 새로운 악장에게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악장 직을 수행하겠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불편하고 부담 가득한 이 상황에서 그는 문제될 것 없다며 분명하게 “Yes!”라고 대답했습니다.
어느덧 카라얀이 이끄는 공연의 첫 리허설. 새로 선임된 악장이 악장 자리에 앉아있는 가운데, 카라얀이 홀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긴장이 흘렀고, 카라얀은 지휘자 자리에서 그를 내려다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천천히 악수를 청했지요. 이윽고 리허설은 시작되었습니다. 카라얀은 떠나지 않았습니다.
카라얀이 후에 “전도유망한 연주자이고, 그의 마음은 음악으로 가득 차 있다”고 칭찬할 정도로 그의 신뢰를 얻은 이 바이올리니스트의 이름은 다니엘 스타브라바(D. Stabrawa, 1955- ). 이렇게 베를린 필의 악장이 된 그는 2021년까지 35년간 이 세계적인 오케스트라의 악장으로 활약하게 됩니다.
당시 스타브라바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젊은 그가 세계 음악계에서 절대적인 명성을 누리고 있는 카라얀이 자신을 악장으로서 원하지 않는다는 메시지에 화도 나고 위축될 법도 했겠지만, 그는 인터뷰에서 당시 ‘난 잃을 것이 없다’고 생각했음을 밝혔습니다. 편안하게 느끼며 자신의 음악을 연주했는데, 이것이 카라얀에게 좋은 인상을 남겼을 것이라고 말했지요.
그렇다면, 카라얀은 왜 처음에 스타브라바를 인정하지 않는 듯한 모습을 보였던 것일까요? 그의 실력에 의문을 품어서였을까요? 물론 그렇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베를린 필의 악장으로 선임될 정도라면 그 실력이라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지요. 이에 대해 카라얀이 직접 밝히지는 않았지만, 스타브라바는 이것이 일종의 테스트가 아닐까 추측했습니다. 그가 쟁쟁한 음악가들이 모여 있는 베를린 필의 악장에 적합한 강인한 정신력을 갖춘 사람인지 카라얀이 그만의 방식으로 알아보려 했다는 것이지요.
마치 압박 면접 같았던 카라얀의 테스트를 잘 통과한 스타브라바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카라얀의 큰 신임을 얻었습니다. 카라얀이 그의 연주를 들으며 눈물을 흘린 적도 있을 정도였지요. 이는 카라얀이 무척 좋아하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 Strauss, 1864-1849)의 <영웅의 생애 (Ein Heldenleben)>를 지휘했을 때 일어난 일이었는데, 당시 스타브라바는 아직 수습기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이 작품에는 악장이 연주하는 거대한 바이올린 솔로가 있고, 카라얀이 총애했던 전임 악장 슈발베는 이 솔로를 탁월하게 연주하는 것으로도 유명했습니다. 여러모로 젊은 신임 악장의 솔로에 관심이 집중되었을 이 공연에서 스타브라바는 멋진 연주를 선보이며 큰 성공을 거두었는데, 그는 작품의 마지막 부분에서 카라얀이 정말 울었다고 회고했지요. 이 성공의 비결을 질문받았을 때, 스타브라바는 웃으며 “슈발베에게 레슨을 두 번 받았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는데, 그가 이 작품을 잘 연주해내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스타브라바는 음악에 대한 자신의 생각, 이를테면 템포나 프레이징에 대한 인식이 카라얀과 비슷하다는 것을 카라얀도 알아서 자신이 카라얀의 큰 신임을 받았을 것이라고 말했는데, 그 이면에는 위의 일화에서도 드러나듯 열심히 배우며 노력하는 자세가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도 초창기 악장 시절은 자신이 오케스트라를 리드한다기 보다는 오케스트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던 때라고 회고했지요.
스타브라바가 악장으로 활약한 35년 동안 베를린 필은 그가 존경해 마지않는 카라얀의 뒤를 이어 클라우디오 아바도(C. Abbado, 1933-2014, 재임 1989-2002), 사이먼 래틀(S. Rattle, 1955-, 재임 2002-2018), 그리고 현재 상임을 맡고 있는 키릴 페트렌코(K. Petrenko, 1972-, 재임 2019- )까지 총 4명의 상임 지휘자가 이끌었습니다. 처음 악장이 되었을 때 백발의 카라얀과 함께 했던 젊은 스타브라바는 세월이 흘러 그 자신이 백발이 되어 그보다 어린 페트렌코를 맞이했지요. 한 악장이 4명의 상임 지휘자 아래에서 활약했다는 것은 적어도 20세기 중반 이후의 베를린 필 역사에서 유래 없는 일인데, 이는 33년 동안 이어진 카라얀의 긴 재임기간(1956-1989)에 기인합니다. 일례로 초창기 카라얀 시대에 악장이 된 슈발베는 아직 카라얀이 상임 지휘자로 있을 때 은퇴했지요. 베를린 필에서 활약하는 총 4명의 악장 중 얼마 전까지 유일하게 카라얀과 아바도 시대를 거쳤던 스타브라바가 은퇴함으로써, 베를린 필 역사의 한 페이지가 넘어가고 있음을 실감합니다. 베를린 필 단원 전체를 보아도 카라얀 시대부터 활약하는 이들의 수는 이제 손에 꼽을 정도가 되었지요. 이는 물론 시간의 흐름에 따른 어쩔 수 없는 변화이지만, 오랫동안 최고의 자리에서 풍부한 경험을 쌓아온 이의 부재는 늘 아쉬움을 느끼게 합니다.
베를린 필 악장 이전의 경력까지 합하면 40년이 넘는 오케스트라 음악가 커리어를 마감한 스타브라바. 실내악 연주자와 지휘자로서도 활약하고 있는 그의 음악 여정이 어떻게 마무리될까요? “모든 공연에서 최선을 다하기 원했다”는 마음가짐으로부터 우러나온 그의 음악이 앞으로도 많은 이들을 미소짓게 하기를 기대합니다.
추천영상: 2020년 5월, 악장 은퇴를 1년 앞두고 있던 스타브라바 헌정 음악회 중 드보르작의 현악 3중주 영상입니다. 당시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으로 인해 아쉽게도 청중이 없는 홀에서 녹화만 되었지요. 2대의 바이올린과 1대의 비올라를 위한 독특한 편성의 이 작품을 그는 베를린 필에 있는 다른 두 명의 폴란드 연주자들과 함께 선보였습니다. (바이올리니스트 크리스토프 폴로넥, 비올리스트 이그나치 미에츠니코프스키) 담백하게 그리고 유려하게 흐르는 그의 바이올린 소리가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이 연주를 감상해 보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srYTGG6Xp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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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얀의 테스트
1986년,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이하 베를린 필)의 악장으로 이제 막 서른을 넘긴 폴란드 출신의 젊은 바이올리니스트가 선임되었습니다. 그는 1957년부터 1985년까지 거의 30년 동안 이 오케스트라의 악장을 역임한 전설적인 인물, 미셸 슈발베(M. Schwalbé, 1919-2012)의 후임이었지요. 그런데, 그가 본격적으로 악장의 역할을 시작하기도 전에 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당시 베를린 필의 상임 지휘자였던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H. v. Karajan, 1908-1989)이 그를 악장으로 선임한 오케스트라의 결정에 반대하고 나선 것이었지요. 카라얀은 오케스트라에 “만일 이 바이올리니스트가 악장 자리에 앉는다면, 나는 즉시 떠날 것”이라는 강경한 어조의 전보를 보냈습니다. 1980년대 초반 클라리네티스트 자비네 마이어(S. Meyer, 1959- )의 수석 연주자 선임 문제를 놓고 본격적으로 불거져 나온 카라얀과 베를린 필의 갈등은 점차 증폭되어서, 1980년대 중반 양측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습니다. 카라얀은 당시 새 단원을 선발하는 오디션도 신경쓰지 않았지요. 아마도 카라얀은 악장 오디션에 참석하지 않았다가 뒤늦게 새 악장을 반대한다는 입장을 내놓았던 듯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관계가 좋지 않다고 해도 카라얀은 종신 상임지휘자로서 베를린 필을 30여년 동안 이끌어 오고 있었으니, 오케스트라는 카라얀의 입장을 무시할 수 없었지요. 오케스트라 측은 새로운 악장에게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악장 직을 수행하겠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불편하고 부담 가득한 이 상황에서 그는 문제될 것 없다며 분명하게 “Yes!”라고 대답했습니다.
어느덧 카라얀이 이끄는 공연의 첫 리허설. 새로 선임된 악장이 악장 자리에 앉아있는 가운데, 카라얀이 홀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긴장이 흘렀고, 카라얀은 지휘자 자리에서 그를 내려다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천천히 악수를 청했지요. 이윽고 리허설은 시작되었습니다. 카라얀은 떠나지 않았습니다.
카라얀이 후에 “전도유망한 연주자이고, 그의 마음은 음악으로 가득 차 있다”고 칭찬할 정도로 그의 신뢰를 얻은 이 바이올리니스트의 이름은 다니엘 스타브라바(D. Stabrawa, 1955- ). 이렇게 베를린 필의 악장이 된 그는 2021년까지 35년간 이 세계적인 오케스트라의 악장으로 활약하게 됩니다.
당시 스타브라바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젊은 그가 세계 음악계에서 절대적인 명성을 누리고 있는 카라얀이 자신을 악장으로서 원하지 않는다는 메시지에 화도 나고 위축될 법도 했겠지만, 그는 인터뷰에서 당시 ‘난 잃을 것이 없다’고 생각했음을 밝혔습니다. 편안하게 느끼며 자신의 음악을 연주했는데, 이것이 카라얀에게 좋은 인상을 남겼을 것이라고 말했지요.
그렇다면, 카라얀은 왜 처음에 스타브라바를 인정하지 않는 듯한 모습을 보였던 것일까요? 그의 실력에 의문을 품어서였을까요? 물론 그렇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베를린 필의 악장으로 선임될 정도라면 그 실력이라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지요. 이에 대해 카라얀이 직접 밝히지는 않았지만, 스타브라바는 이것이 일종의 테스트가 아닐까 추측했습니다. 그가 쟁쟁한 음악가들이 모여 있는 베를린 필의 악장에 적합한 강인한 정신력을 갖춘 사람인지 카라얀이 그만의 방식으로 알아보려 했다는 것이지요.
마치 압박 면접 같았던 카라얀의 테스트를 잘 통과한 스타브라바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카라얀의 큰 신임을 얻었습니다. 카라얀이 그의 연주를 들으며 눈물을 흘린 적도 있을 정도였지요. 이는 카라얀이 무척 좋아하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 Strauss, 1864-1849)의 <영웅의 생애 (Ein Heldenleben)>를 지휘했을 때 일어난 일이었는데, 당시 스타브라바는 아직 수습기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이 작품에는 악장이 연주하는 거대한 바이올린 솔로가 있고, 카라얀이 총애했던 전임 악장 슈발베는 이 솔로를 탁월하게 연주하는 것으로도 유명했습니다. 여러모로 젊은 신임 악장의 솔로에 관심이 집중되었을 이 공연에서 스타브라바는 멋진 연주를 선보이며 큰 성공을 거두었는데, 그는 작품의 마지막 부분에서 카라얀이 정말 울었다고 회고했지요. 이 성공의 비결을 질문받았을 때, 스타브라바는 웃으며 “슈발베에게 레슨을 두 번 받았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는데, 그가 이 작품을 잘 연주해내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스타브라바는 음악에 대한 자신의 생각, 이를테면 템포나 프레이징에 대한 인식이 카라얀과 비슷하다는 것을 카라얀도 알아서 자신이 카라얀의 큰 신임을 받았을 것이라고 말했는데, 그 이면에는 위의 일화에서도 드러나듯 열심히 배우며 노력하는 자세가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도 초창기 악장 시절은 자신이 오케스트라를 리드한다기 보다는 오케스트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던 때라고 회고했지요.
스타브라바가 악장으로 활약한 35년 동안 베를린 필은 그가 존경해 마지않는 카라얀의 뒤를 이어 클라우디오 아바도(C. Abbado, 1933-2014, 재임 1989-2002), 사이먼 래틀(S. Rattle, 1955-, 재임 2002-2018), 그리고 현재 상임을 맡고 있는 키릴 페트렌코(K. Petrenko, 1972-, 재임 2019- )까지 총 4명의 상임 지휘자가 이끌었습니다. 처음 악장이 되었을 때 백발의 카라얀과 함께 했던 젊은 스타브라바는 세월이 흘러 그 자신이 백발이 되어 그보다 어린 페트렌코를 맞이했지요. 한 악장이 4명의 상임 지휘자 아래에서 활약했다는 것은 적어도 20세기 중반 이후의 베를린 필 역사에서 유래 없는 일인데, 이는 33년 동안 이어진 카라얀의 긴 재임기간(1956-1989)에 기인합니다. 일례로 초창기 카라얀 시대에 악장이 된 슈발베는 아직 카라얀이 상임 지휘자로 있을 때 은퇴했지요. 베를린 필에서 활약하는 총 4명의 악장 중 얼마 전까지 유일하게 카라얀과 아바도 시대를 거쳤던 스타브라바가 은퇴함으로써, 베를린 필 역사의 한 페이지가 넘어가고 있음을 실감합니다. 베를린 필 단원 전체를 보아도 카라얀 시대부터 활약하는 이들의 수는 이제 손에 꼽을 정도가 되었지요. 이는 물론 시간의 흐름에 따른 어쩔 수 없는 변화이지만, 오랫동안 최고의 자리에서 풍부한 경험을 쌓아온 이의 부재는 늘 아쉬움을 느끼게 합니다.
베를린 필 악장 이전의 경력까지 합하면 40년이 넘는 오케스트라 음악가 커리어를 마감한 스타브라바. 실내악 연주자와 지휘자로서도 활약하고 있는 그의 음악 여정이 어떻게 마무리될까요? “모든 공연에서 최선을 다하기 원했다”는 마음가짐으로부터 우러나온 그의 음악이 앞으로도 많은 이들을 미소짓게 하기를 기대합니다.
추천영상: 2020년 5월, 악장 은퇴를 1년 앞두고 있던 스타브라바 헌정 음악회 중 드보르작의 현악 3중주 영상입니다. 당시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으로 인해 아쉽게도 청중이 없는 홀에서 녹화만 되었지요. 2대의 바이올린과 1대의 비올라를 위한 독특한 편성의 이 작품을 그는 베를린 필에 있는 다른 두 명의 폴란드 연주자들과 함께 선보였습니다. (바이올리니스트 크리스토프 폴로넥, 비올리스트 이그나치 미에츠니코프스키) 담백하게 그리고 유려하게 흐르는 그의 바이올린 소리가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이 연주를 감상해 보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srYTGG6Xp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