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블로 카잘스 서거 50주년을 맞이하며
첼로의 성자, 파블로 카잘스와 바흐의 운명적 만남
바르셀로나의 한 고서점에서 13세 소년이 발견한 악보뭉치가 그의 인생을 바꿔놓을 줄 누가 알았을까. 첼로의 성자, 평화주의자로 일컬어지는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Pablo Casals)가 소년시절 우연히 발견한 이 악보는 다름아닌 첼로의 구약성서라 불리는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이었다. 170여년 긴 잠에 빠져있던 이 작품을 발견한 순간부터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은 파블로 카잘스에게 인생의 나침판이자 동반자로 함께했다.
1876년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적부터 다양한 악기를 다룰 줄 알았으며 11세부터 첼로에 매진하여 바르셀로나 시립 음악학교에서 호세 가르시아의 가르침을 받았다. 독자적인 첼로 운지법을 스스로 고안해 낼 정도로 그는 10대 나이에 이미 비범한 재능을 보인 첼리스트였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생계를 위해 '카페 '토스트'라는 작은 선술집에서 첼로를 연주하던 그를 발견한 작곡가 이삭 알베니스를 통해 궁정의 개인비서였던 기예르모 모르피 백작를 소개받게 되었고 그의 후원으로 왕실의 장학금을 받고 마드리드 음악원에 진학했다. 3년간 그는 첼로뿐 아니라 왕궁의 커리큘럼을 배우며 엘리트 교육까지 받을 수 있었다. 덕분에 훗날 카잘스는 단순히 악기를 잘 다루는 연주자를 초월해 소통에 능한 예술가로서 정치인을 비롯하여 각계 인사들과 교류하며 세계 각지의 연주 활동을 통해 프랑코 독재정권에 항거하기도 했다.
카잘스는 13세 소년시절 발견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언감생심 성급하게 세상에 내놓지 않았다. 악상기호도 적혀있지 않았고 오류도 존재했으니 작품의 해석에 있어 난관이 많았을 터. 1901년 이 위대한 걸작을 온전히 세상에 발표하기까지 12년이란 긴 시간동안 끊임없이 탐독하고 연습에 임했던것이다. 그는 결국 몇 세기에 걸쳐 한낱 연습곡 정도로 알려졌던 이 작품을 부활시키며 결국 6개의 모음곡을 완전체로 첼로의 구약성서 반열에 올려놓았다. 독주악기로서의 첼로의 위상을 한껏 드높혔음은 물론이다. 카잘스는 바흐에 대해 설명하며 "가장 빛나는 한 편의 시와 같은 무반주 첼로 모음곡의 예만 들어도 바흐를 차갑게 묘사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1898년 파리의 라므뢰 관현악단과의 성공적인 협연 데뷔 이후, 첼리스트로서 탄탄대로를 걸으며 무반주 모음곡을 주 레파토리 삼아 전 세계 콘서트홀을 누비기 시작했다. 소년 카잘스가 처음 이 작품과 조우한지 47년이 지난 1936년, 60세의 나이에 이르러서야 음반 녹음이 착수되었다. 영국의 유명한 에비로드 스튜디오에서 모음곡 2번과 3번이 녹음되었고 스페인 내전으로 인해 프랑스로 이주한 카잘스는 파리에서 녹음을 이어갔다. 결국 1939년이 되서야 녹음이 완성되었고 이 녹음은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집대성한 기념비적인 음반으로 현재까지도 인정받고 있다. 20세기의 위대한 첼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는 "카잘스가 연주하는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들으면 그의 해석과 다르게 연주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인다"라며 카잘스에 대한 경외감을 드러냈다.
스페인 내전 이후 프랑코 독재정권이 들어서자 프라드라는 프랑스의 작은 마을로 망명, 평화를 위한 구호금 모금 연주회를 제외하곤 거의 10여년 동안 항의의 표시로 공개연주를 거부했던 평화주의자 카잘스. 그가 다시 공개석상에서 첼로를 꺼내 들게 된 계기 또한 역시 그의 삶의 음악적 동반자였던 바흐의 서거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페스티벌이었다. 죽기 직전까지도 매일 무반주 모음곡을 연습했으며 임종 직전까지도 제자 이스토민에게 무반주 모음곡을 청했다고. 이쯤이면 카잘스가 바흐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바흐가 13세의 소년 카잘스를 선택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그가 남겼던 유명한 말. "바흐를 매일 연주하면 그다지 외롭지 않다오".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은 1717년~1723년 사이에 작곡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각각의 모음곡들은 알르망드, 쿠랑트, 사라방드, 지그로 이루어진 모음곡의 기본 틀에 프렐류드(전주곡)와 몇 개의 춤곡이 추가되어 모두 6개의 악장으로 이뤄져 있다. 모음곡 2번의 프렐류드는 뭉근하게 심연을 건드리는 곡으로 기품이 넘친다. 각종 드라마, 영화에 삽입되어 익숙한 모음곡 1번의 프렐류드와는 결이 다른 묵직함이 삶의 숙연함을 자아낸다.
* Youtube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Wa5yony2CeA
아드리엘 김은 오스트리아 빈 국립음대에서 지휘와 바이올린을 전공, 졸업(석사)했으며 도이치 방송 교향악단 부지휘자와 디토 오케스트라 수석지휘자를 역임한바 있다, 현재는 지휘자, 작곡가, 문화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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첼로의 성자, 파블로 카잘스와 바흐의 운명적 만남
바르셀로나의 한 고서점에서 13세 소년이 발견한 악보뭉치가 그의 인생을 바꿔놓을 줄 누가 알았을까. 첼로의 성자, 평화주의자로 일컬어지는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Pablo Casals)가 소년시절 우연히 발견한 이 악보는 다름아닌 첼로의 구약성서라 불리는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이었다. 170여년 긴 잠에 빠져있던 이 작품을 발견한 순간부터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은 파블로 카잘스에게 인생의 나침판이자 동반자로 함께했다.
1876년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적부터 다양한 악기를 다룰 줄 알았으며 11세부터 첼로에 매진하여 바르셀로나 시립 음악학교에서 호세 가르시아의 가르침을 받았다. 독자적인 첼로 운지법을 스스로 고안해 낼 정도로 그는 10대 나이에 이미 비범한 재능을 보인 첼리스트였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생계를 위해 '카페 '토스트'라는 작은 선술집에서 첼로를 연주하던 그를 발견한 작곡가 이삭 알베니스를 통해 궁정의 개인비서였던 기예르모 모르피 백작를 소개받게 되었고 그의 후원으로 왕실의 장학금을 받고 마드리드 음악원에 진학했다. 3년간 그는 첼로뿐 아니라 왕궁의 커리큘럼을 배우며 엘리트 교육까지 받을 수 있었다. 덕분에 훗날 카잘스는 단순히 악기를 잘 다루는 연주자를 초월해 소통에 능한 예술가로서 정치인을 비롯하여 각계 인사들과 교류하며 세계 각지의 연주 활동을 통해 프랑코 독재정권에 항거하기도 했다.
카잘스는 13세 소년시절 발견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언감생심 성급하게 세상에 내놓지 않았다. 악상기호도 적혀있지 않았고 오류도 존재했으니 작품의 해석에 있어 난관이 많았을 터. 1901년 이 위대한 걸작을 온전히 세상에 발표하기까지 12년이란 긴 시간동안 끊임없이 탐독하고 연습에 임했던것이다. 그는 결국 몇 세기에 걸쳐 한낱 연습곡 정도로 알려졌던 이 작품을 부활시키며 결국 6개의 모음곡을 완전체로 첼로의 구약성서 반열에 올려놓았다. 독주악기로서의 첼로의 위상을 한껏 드높혔음은 물론이다. 카잘스는 바흐에 대해 설명하며 "가장 빛나는 한 편의 시와 같은 무반주 첼로 모음곡의 예만 들어도 바흐를 차갑게 묘사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1898년 파리의 라므뢰 관현악단과의 성공적인 협연 데뷔 이후, 첼리스트로서 탄탄대로를 걸으며 무반주 모음곡을 주 레파토리 삼아 전 세계 콘서트홀을 누비기 시작했다. 소년 카잘스가 처음 이 작품과 조우한지 47년이 지난 1936년, 60세의 나이에 이르러서야 음반 녹음이 착수되었다. 영국의 유명한 에비로드 스튜디오에서 모음곡 2번과 3번이 녹음되었고 스페인 내전으로 인해 프랑스로 이주한 카잘스는 파리에서 녹음을 이어갔다. 결국 1939년이 되서야 녹음이 완성되었고 이 녹음은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집대성한 기념비적인 음반으로 현재까지도 인정받고 있다. 20세기의 위대한 첼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는 "카잘스가 연주하는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들으면 그의 해석과 다르게 연주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인다"라며 카잘스에 대한 경외감을 드러냈다.
스페인 내전 이후 프랑코 독재정권이 들어서자 프라드라는 프랑스의 작은 마을로 망명, 평화를 위한 구호금 모금 연주회를 제외하곤 거의 10여년 동안 항의의 표시로 공개연주를 거부했던 평화주의자 카잘스. 그가 다시 공개석상에서 첼로를 꺼내 들게 된 계기 또한 역시 그의 삶의 음악적 동반자였던 바흐의 서거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페스티벌이었다. 죽기 직전까지도 매일 무반주 모음곡을 연습했으며 임종 직전까지도 제자 이스토민에게 무반주 모음곡을 청했다고. 이쯤이면 카잘스가 바흐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바흐가 13세의 소년 카잘스를 선택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그가 남겼던 유명한 말. "바흐를 매일 연주하면 그다지 외롭지 않다오".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은 1717년~1723년 사이에 작곡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각각의 모음곡들은 알르망드, 쿠랑트, 사라방드, 지그로 이루어진 모음곡의 기본 틀에 프렐류드(전주곡)와 몇 개의 춤곡이 추가되어 모두 6개의 악장으로 이뤄져 있다. 모음곡 2번의 프렐류드는 뭉근하게 심연을 건드리는 곡으로 기품이 넘친다. 각종 드라마, 영화에 삽입되어 익숙한 모음곡 1번의 프렐류드와는 결이 다른 묵직함이 삶의 숙연함을 자아낸다.
* Youtube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Wa5yony2CeA
아드리엘 김은 오스트리아 빈 국립음대에서 지휘와 바이올린을 전공, 졸업(석사)했으며 도이치 방송 교향악단 부지휘자와 디토 오케스트라 수석지휘자를 역임한바 있다, 현재는 지휘자, 작곡가, 문화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