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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준의 클래스토리
하나의 작품, 세 개의 무대, 세 명의 지휘자
박병준
입력 2023-03-24 15:14 수정 최종수정 2023-03-24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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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작품, 세 개의 무대, 세 명의 지휘자

벌써 꽤 오래전인 2007년 여름, 비올라 주자로 처음 루체른 페스티벌 아카데미(Lucerne Festival Academy)에 참여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여름이면 세계 곳곳에서 젊은 음악가들이 일정 기간 동안 모여서 유명한 지휘자 및 앙상블 연주자들의 지도를 받으며 리허설과 공연을 하는 프로그램들이 열리는데 루체른 페스티벌 아카데미도 그 중 하나입니다.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피에르 불레즈(P. Boulez, 1925-2016)에 의해 2004년 창설된 이 아카데미는 우리가 흔히 낯설어하고 또 난해하다고 여기는 현대음악을 집중적으로 다룬다는 점에서 여타의 프로그램들과 뚜렷하게 구분되지요.

2007년 당시 기대와 설렘을 안고 루체른에 도착한 젊은 연주자들과 지휘자들을 기다리고 있던 야심찬 프로젝트가 있었습니다. 바로 칼하인츠 슈톡하우젠(K. Stockhausen, 1928-2007)이 1955년부터 1957년까지 작곡한 <세 개의 오케스트라를 위한 그루펜 (Gruppen für drei Orchester)>을 연주하는 것이었습니다. 독일어 ‘그루펜’은 그룹들(Groups)이라는 뜻인데 얼핏 세 개의 오케스트라가 모여서 이런 제목이 지어졌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여기서의 그룹은 하나 혹은 그 이상의 공통된 특성에 따라 결합된 음들의 그룹을 의미합니다. 그 특성이란 강약, 악기 음색, 음역과 같은 것들이죠.

세 개의 오케스트라가 하나의 작품을 연주한다고 할 때 어떤 궁금증들이 우선 떠오를까요? 아마 오케스트라의 규모와 배치가 아닐까 합니다. 이러한 사항들은 작곡가 자신이 악보에 매우 명확하게 표기해 두었는데 <그루펜>의 연주를 위해서는 총 109명의 연주자가 필요합니다. 다양한 타악기들과 피아노, 그리고 전자 기타까지 등장하는 다채로운 편성을 지니고 있지요. 각 오케스트라의 악기 편성은 조금씩 다르지만 규모는 매우 균등해서 오케스트라 1에는 37명의 연주자가, 오케스트라 2와 3에는 각각 36명의 연주자가 자리합니다. 그리고, 3명의 지휘자가 각각의 오케스트라를 이끌게 됩니다. 

그렇다면 3개의 오케스트라는 어떻게 자리할까요? 세 개의 오케스트라가 하나의 무대에 조금씩 떨어져 앉는 것이 아니라, 각 오케스트라는 독립된 무대를 갖게 됩니다. 우리가 연주회장에서 보는 무대, 그러니까 청중석 정면의 무대에는 오케스트라 2가, 청중석 왼편에는 오케스트라 1이, 그리고 오른편에는 오케스트라 3이 자리하게 되지요. 그런데 각 오케스트라가 이렇게 자리할 때 결정적인 문제가 하나 생길 수 있습니다. 

일반적인 무대에서 지휘자는 청중을 등진 채 오케스트라를 바라보며 지휘합니다. 그런데, 청중석을 둘러싼 세 개의 무대에서 지휘자들이 청중을 등진 형태로 지휘를 하면 지휘자들끼리 서로 신호를 주고받을 수 없는 문제가 생겨버립니다. 그래서, 이 작품을 연주할 때에는 아래 사진과 같이 연주자들이 청중을 등지고, 지휘자가 다른 지휘자들을 바라볼 수 있도록 벽 쪽에서 청중석 방향으로 서서 지휘합니다.

앙상블 앙테르콩탕포랭과 파리 음악원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그루펜> 공연 장면. 청중석을 오케스트라들이 둘러싸고 있으며, 지휘자들이 서 있는 방향이 일반적인 공연과 정반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스크린샷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34_SfP7ZCXA)


약 25분 정도 걸리는 <그루펜>의 악보를 보면 템포 변화도 심하고 변칙적인 박자 구성도 많으며 리듬도 복잡해서 어떻게 이 작품을 연습해서 무대에 올릴 수 있을까 궁금해집니다. 심지어 이 작품에는 분명 동시에 연주하는데, 오케스트라들이 서로 다른 템포와 박자 기호를 갖고 있는 부분들도 존재합니다. 독립적이라는 말이 실감나지요. 2007년의 기억을 더듬어 보면, 리허설은 단계별로 차곡차곡 진행이 되었습니다. 리허설 일정은 각 오케스트라가 따로 연습을 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는데, 한 오케스트라 전체가 함께 연습하는 것에 앞서 현악기, 관악기, 타악기 파트가 따로 연습을 했지요. 이후에 각 오케스트라 별로 모여 연습을 한 후에야 세 오케스트라가 한 곳에 모여 리허설을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첫 전체 리허설은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고 혼란스러웠는데, 첫 휴식 시간이 되자, 한 더블 베이스 연주자가 지금까지 겨우 세 음 연주했다고 “Just Three Notes!”라고 소리칠 정도였습니다.

<그루펜>을 몇 번 지휘해본 래틀(S. Rattle, 1955- )이 “짜증나게 복잡하다 (irritatingly complex)”고 묘사한 이 작품을 공연하는 것은 지휘자들의 입장에서도 큰 도전일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맡은 오케스트라를 이끌며 동시에 다른 지휘자들과도 합을 맞춰야 하니, 그들의 어깨는 대부분의 오케스트라 연주자들보다 더 무겁겠지요. 이 작품의 준비 과정을 담은 영상들을 보면 지휘자들이 그들의 연습 시작 과정에서 오케스트라 없이 악보만 놓고 열심히 박자를 세며 서로 합을 맞추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보통의 공연보다 확실히 많은 준비 과정이 필요함을 알게 해 주지요.

전체 오케스트라 리허설에서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들이 발생할 수 있는데, 그것은 각 지휘자들 사이의 거리가 멀어서 서로 간에 소통이 힘들고, 청중석에서 음악이 어떻게 들리는지 지휘자가 파악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경우 지휘자가 리허설 도중 오케스트라에게 계속 연주하라고 지시한 후 본인은 청중석으로 가서 음향을 파악하곤 하지만, <그루펜>에서 지휘자가 자리를 비우면 연주 진행이 되지 않습니다. 이에 슈톡하우젠은 리허설이 시작되기 전, 꼭 마이크와 모니터 스피커를 설치하여 이를 통해 서로 소통하라고 권했고, 전체 음향을 잘 파악하기 위해 음향감독을 리허설 때 청중석에 있게 해야 한다고 조언했지요.

연주하기 까다로운 작품 <그루펜>. 얼핏 복잡하게만 느껴지는데, 이 작품을 굳이 연주회장까지 가서 들어볼 가치가 있을까요? <그루펜> 연주에 참여해본 입장에서 느꼈던 아쉬움은, 이 작품을 청중석에서 들어볼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연주회장에서 청중은 대게 자신의 앞에서 울려퍼지는 오케스트라의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러나, 위의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작품 공연에서는 오케스트라가 청중을 세 면에서 둘러싸게 되어 청중은 소리의 울림 한 가운데에 있게 됩니다. 비록 익숙한 어법은 아니지만, 다채로운 악기 편성으로 이루어진 오케스트라의 다양한 음향을 말 그대로 입체적으로 만끽할 수 있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이 작품을 현장에서 들어볼 가치는 충분하지 않을까 합니다. 

많은 준비 과정이 필요한 <그루펜>은 세계적으로도 자주 연주되지 않습니다. 만일 이 작품의 공연 소식을 어디에서든 접하게 된다면, 흔치 않은 그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권해드리고 싶네요. 우리 나라에서도 이 기회를 잡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추천영상: 현대음악 연주에서 세계적인 권위를 지닌 앙상블 앙테르콩탕포랭과 파리 음악원 오케스트라의 2016년 연주입니다. 종종 화면을 셋으로 나누어 세 지휘자와 오케스트라의 모습을 동시에 보여주는데, 이를 통해 각 오케스트라가 때로 서로 다른 템포와 박자로 움직인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지요. 영상이라는 매체의 장점을 잘 살렸으며, 연주 또한 뛰어나서 <그루펜>을 감상하기에 안성맞춤인 영상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34_SfP7ZCXA


<필자소개>
박병준씨는 음악학자이자  음악칼럼니스트로 오스트리아 그라츠 국립음악대학교에서 비올라를 전공했으며 같은 대학에서 박사학위(음악학)를 취득했다. 현재는 광명 심포니 오케스트라 비올라 수석 연주자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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