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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드리엘 김의 모멘텀 클래식
편집부
입력 2022-01-25 14:55 수정 최종수정 2022-02-04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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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Joseph Haydn (1732~1809)

나폴레옹의 자비

하이든 인물탐구

교향곡의 아버지라 불리는 하이든((1732–1809). 교향곡의 형식을 정립한 작곡가이자 모짜르트, 베토벤과 어깨를 나란히하며 빈 고전파 3인방으로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작곡가다. 하지만 모짜르트, 베토벤과 같은 드라마틱한 천재로서의 삶과는 거리가 있어서인지 비교적 덜 회자되는 인물이기도 한데 18세기 당시는 어땠을까. 하이든은 유럽 음악계의 슈퍼스타였으며 생전에 모짜르트, 베토벤보다 유럽 전역에서 더 큰 인기와 명예를 누린 사람이었다. 게다가 77세까지 살며 장수했던 몇 안되는 작곡가였다.

잘 알려진 흥미로운 일화. 1809년 나폴레옹의 비엔나 침공 당시 하이든은 병상에 누워 미처 피신하지 못했다. 포탄이 오가는 일촉즉발의 상황속에 하이든의 안위를 걱정했던 나폴레옹은 군사들로 하여금 보초를 서게함으로써 마에스트로를 전쟁의 위험으로부터 지켰다. 한때 유럽을 제패했던 권력자가 한 예술가를 예우했다는 사실은 전유럽에 걸친 하이든의 인지도와 그에대한 존경심을 말해준다.

30년간 에스테르하지 가문 휘하에서 궁정악장으로 활동하다가 1790년 정년퇴직한 하이든을 열렬히 맞아준 영국의 반응 또한 이례적이었다.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 해, 1791년 영국의 공연기획자 잘로몬의 권유로 런던을 처음 방문했던 하이든은 이미 유명인사였다. 그의 작품들은 이전 부터 런던에 출판되어 널리 연주되고 있었으며 영국의 매스컴은 그의 첫 방문을 떠들썩하게 다루었다. 3일 동안 모든 신문들이 일제히 그에 관한 기사를 실어 날랐다고 한다. 영국의 음악학자 찰스 버니는 런던시민의 반응은 열광적이었으며 "하이든의 기악곡들만큼 영국인들에게 관심과 즐거움을 선사한 작곡가는 없었다"고 했다. 영국의 왕족들 또한 그에게 존경심을 표했다. 성 제임스 궁에서 열린 그의 콘서트를 찾은 황태자는 가장 먼저 하이든에게 인사를 건넸다고 한다. 영국 왕 조지 3세는 영국에 계속 머물 것을 권유하였다. 당시 하이든은 "런던의 모든 사람들이 나를 알고 싶어했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두 차례 큰 환대속에 방문한 런던여행을 통해 그의 대표작인 12개의 런던 교향곡들이 탄생한다.

불운한 천재들과는 달리 재정적인 성공과 더불어 생전에 당대최고의 음악가로 명성을 누렸던 그에겐 남다른 운이 따랐던 것일까. 그는 동시대의 천재 모짜르트와 같은 후배를 살뜰하게 챙길 줄 알았던 성품과 타고난 현실감각을 갖춘 예술가로서는 보기 드문 전인적인 인재였다.
29세의 나이에 에스테르하지 가문에 취직하며 안정적인 삶을 보장받기 전까지 그는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여섯살부터 남의 집에서 더부살이하며 음악교육을 받아야했고 지인의 집을 전전하며 생활고에 늘 시달리던 예술가였다. 거리악사, 음악교사등 음악을 통한 수입외에 작곡가 밑에서 잡일까지 도맡았다. 하지만 그는 인색하기보다는 온화하고 남을 품을 줄 아는 넉넉한 인품의 소유자로 성장했으며 늘 유머가 떠나지않는 사람으로 알려져있다. 1788년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조반니의 비엔나 공연이 끝난 후 라주모프스키 공작이 주최한 파티에서 참석자들은 작품에 대한 혹평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들이 존경해 마지않던 하이든에게 의견을 물었을때 그는 이런 대답을 내놓았다. " 내가 이 논란을 잠재울 순 없겠지만 한가지는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모차르트가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작곡가라는 사실입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는 신분이나 위신에 연연하지않고 관계를 중시했는데  유언장에 하인들에게 유산을 상속한다는 내용을 넣기도 했다. 에스테르헤지 가문의 후작이 하이든의 퇴직 이후에도 그와 친분을 유지하며 그를 예우했던 기록은 그의 성실성을 말해주기도 한다. 

너무나 유명한 일화로 잘 알려져있듯, 여름궁전에 머무르던 에스테르하지 후작이 떠날 기미를 안보이자 가족에 대한 그리움에 사무친 궁정악단 연주자들이 집에 가지못하자 불만이 쌓이기 시작한다. 하이든은 꾀를 내어 우회적인 메세지로 그의 '고별' 교향곡 마지막 악장에서 연주자들이 촛불을 끄고 한명씩 무대에서 사라지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결국 후작은 음악적 함의를 간파하고 연주자들을 집으로 떠나보냈다고 한다. 탁월한 공감능력과 따뜻한 유머가 넘치는 하이든의 캐릭터를 어렵지않게 떠올릴 수 있다.

공감과 소통에 능했던 그에게서 비즈니스 맨으로서의 수완도 엿보인다. 영국 BBC에서 제작한 '영국음악의 탄생'이라는 다큐멘터리의 내용 중에 하이든이 일찌기 영국이라는 마켓에서 큰 수익을 거둘 것을 짐짓 짐작하고 런던 여행을 택했다는 대목이있는데 수긍이가는 내용이다.그는 실제로 에스테르하지 후작 밑에서 몇십년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을 1년만에 런던에서 벌어들였다. 하이든은 자신의 몸값을 높이는데도 성공했다. 파리의 귀족 도니 백작에게서 파리에서 연주될 교향곡들을 의뢰받았는데 모차르트의 31번 '파리' 교향곡과 비교해서 5배나되는 거금을 받아내기도 했다. 특히 출판사들과 거래할때 수익을 극대화하기위해 부단히 노력했는데 악보 저작권에 밝았던 그는 출판사들과의 협상에서 터무니없는 가격을 부르며 불공정한 거래도 서슴치 않았다고 한다.

음악학자 제임스 웹스터는 그의 이러한 면모에 대해 어린시절 가난의 굴레 속에 하이든이 겪었던 고난의 영향을 간과할 수 없다는 주장과 함께 " 비지니스 관계가 아닌 친척, 음악가,하인들과의 관계에서는 관대했으며 자선연주회에도 열심이었던 사람이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차가운 머리와 따뜻한 감성의 중용의 미덕을 갖춘 예술가로 당시에 존경을 받았으며 어쩌면 특히 현시대에 배울 점이 많은 아티스트일지도 모른다. 이제 현실감각과 공감능력이 결여된 채 예술만 알아서는 살아남기 힘든 세상 아닌가.

 '장학퀴즈'의 시그널 음악으로 익히 알려진 트럼펫 협주곡 3악장 만큼이나 귀에 쏙 박히는 명쾌한 테마를 가진 하이든의 첼로 협주곡 1번 1악장을 추천한다. 그 존재가 잊혀져있다가 풀케르트라는 음악학자에 의해 1961년 프라하에서 악보가 발견되었는데 1761~1765년 사이에 하이든이 에스테르하지가에 재직할 당시 작곡되었다. 200년간 잠자고 있었던 이 작품은 첼로와 오케스트라가 끊임없이 대화를 이어가는 아름다운 바로크 양식이 깃든 작품으로 첼로 협주곡 레퍼토리로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다. 

유튜브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mooB5Q-0FIE

<필자소개> 
아드리엘 김은 오스트리아 빈 국립음대에서 지휘와 바이올린을 전공, 졸업(석사)했으며 도이치 방송 교향악단 부지휘자와 디토 오케스트라 수석지휘자를 역임한바 있다, 현재는 지휘자, 작곡가, 문화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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