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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창구 교수의 약창춘추
<241> 13년만의 걷기, 그리고 구세주
심창구 서울대 명예교수
입력 2018-01-31 09:38 수정 최종수정 2018-01-31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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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창구 서울대 명예교수▲ 심창구 서울대 명예교수
2001년 경미한 보행 장애를 겪고 있던 3살짜리 여아 (A양)가 대구의 한 대학병원에서 뇌성마비 판정을 받았다. 수 차례 입원치료를 받고 국내외 병원을 전전했으나 상태가 나아지지 않았다.

20세가 된 2012년 7월, 전처럼 재활치료를 받던 중 물리치료사 윤씨로부터 “뇌병변이 아닌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혹시나 하고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 다시 진찰을 받았다.

의료진은 MRI 사진 등을 보더니 이 병은 ‘뇌성마비가 아니라 도파 반응성 근육긴장이상’이라고 했다. 즉 신경전달 물질과 관련된 효소의 이상으로 주로 소아에게 나타나는 소위 ‘세가와병’이라는 인데, 소량의 도파민을 투여하면 치료할 수 있는 병이라고 대구 병원과는 다른 진단을 내린 것이다.

새로운 진단에 따라 도파민을 투여 받은 A양은 투여 개시 단 1주일만에 스스로 걷게 되었다. 13년을 못 걷던 사람이 1주일 만에 기적적으로 걷게 되다니 기적이 얼마나 감격했겠는가? 지난 13년간이 누워지낸 세월이 억울하게 생각된 A양과 A양의 아버지는 대구의 그 병원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재판부는 그 당시의 의료 기술로는 세가와 병이라고 진단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보고 “환자에게 1억원을 배상하라”는 강제조정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환자 가족은 이 결정을 수용했다고 한다. 이상은 2017년 12월 6일자 한국일보 기사를 가감한 것이다.

13년 누워있던 세월을 어찌 1억원에 보상받을 수 있겠는가? 100억이라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서 이 판결은 환자의 삶을 너무 낮게 평가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대구의 그 병원도 고의(故意)로 오진(誤診)한 것이 아니라 당시의 의료수준으로 세가와 병인 줄 알기 어려워 그리 진단한 것이라니 크게 나무랄 수도 없는 법적 상황이었던 모양이다.

A양에게 있어서 세가와 병이라고 새로운 진단을 내려 준 의료진은 구세주(救世主)였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당신의 병은 뇌성마비가 아닌 것 같으니 다른 데 가서 다시 진찰을 받아보라’고 말해 준 물리치료사는 환자를 구세주 앞으로 인도한 복음(福音)의 전도자였던 셈이다.

이 세상의 의료진은, 극히 일부 악덕(惡德)한 케이스를 제외하고는, 모두 환자의 치유를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들은 모두 선(善)한 의도로 환자 치료에 임하는 것이다. 그러나 환자의 입장에서 보면 A양의 경우처럼 어느 의료진을 만나느냐에 따라 병을 고치느냐 못 고치느냐가 극명하게 달라지기도 한다.

그러므로 환자를 다른 의료진이나 다른 의료기관으로 보내는 것이 선한 의도라고 할 수 있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자기가 치료하겠다고 고집을 피우며 환자를 붙잡아 둔 결과, 환자의 생명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였다면 그 의료진의 고집은 더 이상 선의(善意)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비슷한 의미에서 문외한(門外漢)들이 어떤 환자에게 섣부른 조언을 하는 것은 삼가야 한다. 그 조언 때문에 환자가 더 좋은 진료를 받을 기회를 늦추거나 잃게 되었다면 그 조언은 결과적으로 악(惡)한 결과를 낳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심지어 의료진까지도, 환자의 질병이나 건강에 관해 조언을 하거나 의술을 베풀 때에는 늘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행여 나 때문에 환자가 더 좋은 치료를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TV를 보면 건강에 대해 지나치게 단정적인 조언을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행여 그들의 조언 때문에 시청자들의 건강이 훼손되지 않기를 기원할 따름이다.

며칠 전 교회에서 ‘왜 예수님만을 구세주라 하는가?’에 대한 설교를 들었다. 나에게는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영육(靈肉)을 살려 줄 진정한 구세주 단 한 명이 필요하다는 말씀으로 들렸다. 선한 의지를 가진, 그러나 환자를 살릴 능력이 모자라는 의료진을 모두 구세주라 할 수는 없다는 말씀이다.

새 해 아침, 물리치료사의 복음을 경청했던 A양처럼, 나를 구세주 앞으로 인도하는 진정한 복음에 더욱 귀와 마음을 열고 살기를 다짐해 본다. 근하신년(謹賀新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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