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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 홍랑(洪娘) <제13話>
편집부
입력 2019-06-26 09:36 수정 최종수정 2019-06-26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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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말에 채찍질을 한다 했던가? 고죽은 탄 말에 숨 돌릴 사이도 없이 채찍을 날렸다. 한시라도 빨리 홍원에 가려는 속내다. 종성(鐘城)의 부사 겸 병마절도사를 겸한 발령을 받고부터 홍랑이 눈앞에 나타나 잠도 설쳤다.

종성군은 함경도 최북단으로 여진족 오랑캐들이 시도 때도 없이 날뛰어 조선은 하루도 평안한 날이 없다. 때는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7~8년 전이다. 선조(宣祖·1552~1608) 시대다. 고죽은 종성부사와 병마절도사를 겸한 부임길에 올랐다. 입법·사법·행정을 한손에 쥐고 종성으로 달린다.

가늘 길에 홍원에 들려 홍랑도 데리고 가려는 속내다. 경성 북평사로 갈 때와는 격이 다르다. 구종(驅從·하인)까지 거느리고 당당한 모양새다. 고죽도 기분이 좋아 한시라도 빨리 홍원에 가 홍랑에게 자랑하고 싶으며 아이도 보고 싶은 것이다. 아직 이름도 지어주지 못한 아이가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걱정까지 하고 있다.

고죽은 말 위에서 하늘을 쳐다보며 희죽이 웃음까지 보인다. 자기를 빼어 닮은 아이를 안고 있는 홍랑을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조선 제일의 풍류객과 조선 제일의 천재 절기(絶妓) 홍랑 사이의 아이를 떠올리는 고죽은 신바람이 나고 하늘을 찌르는 기쁨이 용솟음 치고 있다.

사흘 밤을 말 위에서 자다시피 하여 홍원에 닿았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려온 것이다. 홍랑이 보고 싶기도 하지만 방긋방긋 웃을 아이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게 사내인가 보다.

홍랑의 집 울타리엔 해마다 여름 꽃인 장미와 해바라기가 만발한다. 올해도 계절은 변하지 않았다. 노란 해바라기 사이사이로 빨간 장미가 활짝 피어 이 세상이 아닌 선경(仙境)같아 보였다. “홍랑아 내가 왔느니라!” 고죽은 “여봐라 안에 누구 없느냐?”란 사대부 모습은 생략하고 사립문을 한걸음에 지나 내실까지 들어갔다. “에구머니! 누구시기에 남의 집 내실을 이토록 무례하실까? 당장 나가세요!” 앙칼진 여인의 목소리다.

생소한 여인의 목소리다. “이 집이 홍랑의 집이 아닌가요? 제가 고죽 최경창이올시다.” “아 예...” 그때서야 여인의 음성이 낮아지면서 “홍랑은 재 넘어 밤나무골로 이사를 갔습니다.” 하였다. 여인은 힐긋 곁눈질로 고죽을 훔쳐보며 ‘네가 그 알량한 고죽이냐’하는 눈치다.

그랬다. 홍랑은 생활이 어려워 살던 집을 팔고 밤나무골 움막 같은 집으로 이사를 갔다. ‘아름다운 계절은 쉬이 지나가니 / 젊은 시절이 그 얼마나 되랴 ’ 노란국화를 보면 또 지고 있고 / 흰 머리는 뽑아도 또 많아지네 / 외진 시골집을 누가 찾아오랴 / 사립문에 해가 저절로 기우네 / 어린것들이 차츰 말을 배우니 / 그것만이 내 어긋난 삶을 위로해주네‘ 고죽의 《중양절》이다.

사실 홍랑은 고죽의 여자가 된 후 기쁨은 잠시 뿐 안타깝고 고달픈 생활이 더 많았을 터다. 격정적 동거는 찰나에 불과하고 헤어져 있음이 숙명적이어서다.

지금은 더욱 그러하다. 어렵게 마련해 평생을 사노라 했었던 집도 팔고 움막 같은 집으로 이사하여 몸과 마음이 지옥이다. 홍랑은 사실 죽지 못해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 행여 신앙 같은 고죽이 찾아올까 하는 기대가 있어서다. 막상 찾아오면 걱정은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아이를 잃은 어미여서다. 그런데 지금 고죽의 음성이 들려오고 있다. 비몽사몽일까? "홍랑아! 내가 왔다.“ 비몽사몽은 아니었다. 해가 지려면 아직 한참은 더 있어야 할 때다. ”홍랑아 내가 왔느니라!“ 고죽의 음성이 분명하다. 목말라 하는 목소리다.

홍랑은 벼락같이 뛰어나가 불같은 고죽의 품에 안기고 싶으나 떠나간 아이 때문에 망설이고 있는 것이다. ‘광릉성 강가에는 / 술집도 많아 / 붉은 주렴 푸른 휘장이 / 강줄기에 비쳤지 / 달 밝은 밤엔 노래와 춤 / 그 가운데서 잠을 잤건만 / 빗줄기 흩어지고 구름도 흩날려 / 그 옛날 놀이가 간데없어라’ 고죽의 《강가의 다락에서》다. (시옮김 허경진)

홍랑은 고죽의 여자가 돼서 얻은 것은 영혼의 행복이고 잃은 것은 육체의 기쁨일 게다. 짧은 육체의 희열은 긴 영혼의 고독으로 찾았을 터다. 지금이 절정기인데 영혼의 행복까지 무너지려 한다. 
 그런데 지금 고죽이 홍랑을 목마른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고 있다. 여자는 사내의 부름에 바늘에 실 가듯 문을 열고 나간다. “네가 홍랑이냐?” 고죽은 앙상한 여인의 모습에 눈을 의심한다. 꽃보다 아름다웠던 모습이 아니 여서다.

일년 사이에 여자는 그렇게 변해 버렸다. 종교같이 생각했었던 고죽이 홍랑을 돌봐주지 않아 여자는 방치된 꽃과도 같아졌기 때문이다. “아이는 어디 갔느냐?” 고죽은 홍랑을 뜨겁게 품을 생각은 않고 아이부터 찾았다. “나으리 황공하옵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홍랑은 엎드려 통곡하며 더 말을 잇지 못하였다.

고죽은 더 묻지 않았다. 아이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직감으로 느꼈다. “알았다. 알았느니라.  일어나거라...” 고죽은 홍랑을 일으켜 억세게 품었다. 홍랑이 숨이 막힐 것 같다. 하지만 가슴이 뛰고 기쁨이 충만하다. 일 년 가까이 소식이 궁금하여 애태웠던 마음이 봄눈 녹듯 사라졌다.

여자가 사랑하는 사내 품에 안기는 행복감이다. 지금 홍랑이 찰나지만 영원히 잊지 않으려는 여자의 행복한 시간일 게다. “홍랑아 내가 종성부사로 가는 길이다. 너도 얼른 준비를 해서 떠나야 하느니라!” 홍랑은 아무런 반응이 없다. 고죽의 품이 너무 따뜻하고 포근하여 영원히 잠들고 싶은 순간이다.

하지만 고죽은 함경도에서도 최북단 종성의 여진족 오랑캐들이 날뛰는 상황이 눈에 선해 마음이 바쁘다. “홍랑아, 이제 우리 종성으로 떠나야 하느니라!” 라는 말과 함께 참았던 육체의 허기를 채우려 서두른다. 그들은 낮을 밤으로 생각하고 화촉동방 같은 기쁨을 즐기고 서둘러 종성길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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