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무기록에 모든 정보가 다 있으니 이를 그대로 다른 병원에 주면 돼요.”
담당의사는 자신있게 말했다. 그런데, 막상 서울대 병원에서 의무기록을 받아 보았을때 난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 의료진이 작성한 기록이 부정확, 불명확, 비논리적이어서 전문가들이 보아도 이해하기 어렵게 보였기 때문이다. 아마 그래서 서울삼성병원으로 옮겼을 때 담당의사가 서울대 병원 의사나 다른 의사가 쓴 기록은 읽지도 않고 검사결과만 보았나 보다.
병원에서 의사들이 기록하는, 소위 차트라고 불리는 것은 SOAP 노트 (note)이다. SOAP은 여기서는 비누가 아니라 Subjective, Objective, Assessment, Plan의 첫 글자로 노트를 구성하는 네 부분을 각각 지칭하는 약자이다. Subjective (주관적) 부분에는 환자가 의사에게 호소하는 것 - 예를 들면, 증상 – 을, Objective (객관적) 부분에서는 의사가 관찰한 것 – 예를 들면, 검사결과 - 을 기록한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정보 – 환자의 주관적인 것과 의사가 관찰하고 검사한 객관적인 것 –을 바탕으로 환자의 상태를 평가 (Assessment) – 진단 – 하고, 이에 따라 계획 (Plan)을 세운다. 이처럼 SOAP 노트는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평가하고 계획을 짜는 논리적인 글이기 때문에 읽는 사람이 작성자의 임상적 사고과정 (clinical reasoning)을 알 수 있다.
SOAP 노트는 작성자와 다른 의료진과의 중요한 의사소통 수단이다. 보통, 환자를 오랜 기간동안 여러 번에 걸쳐 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예: 재진) 작성자는 SOAP노트를 통해 과거의 환자 상태와 치료 방법에 대한 정보를 얻음으로써 현재 환자 상태와 치료에 이용할 수 있다. 그리고, 환자를 다른 의료진에게 진료의뢰할 경우, SOAP 노트는 그 동안의 환자 상태와 치료를 이해하는 데 아주 유용한 수단이다. 그래서, 난 환자를 보기 전에 내가 이전에 쓴 SOAP 노트와 다른 의사들이 쓴 SOAP 노트를 반드시 읽어 본다.
이처럼 SOAP 노트는 임상에서 중요한 의사소통 수단이기 때문에 SOAP 노트에 담긴 정보는 정확해야 한다. 또, 명확하게 기재하여 오해의 소지가 없어야 한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작성자의 임상적 사고과정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노트가 부정확, 불명확하거나 작성자의 사고과정을 이해할 수 없으면 다른 사람들이 환자의 상태와 치료 방법에 대해 오해할 수 있어 환자에게 오히려 해를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자, 이제 어머니가 담당의사를 마지막으로 방문한 날이었던 7월 6일에 쓰여진 의사의 SOAP 노트를 살펴보자.
담당의사의 7월6일자 SOAP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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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g pain after food 3MA wt loss
7 kg DM: - anorexia –“
또 하나 특징은 문장이 아닌 단어만 늘어놓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확하게 이해하기는 힘들지만 내가 아는 어머니의 상태와 그날의 기억을 통해 해석해 보기로 한다.
소화불량 (indigestion)
윗배 (epig = epigastric) 통증(pain) 음식을 먹은 다음 (after food) 3 개월 (month의 약자로 보통은 mo를 쓴다. 하지만, 내용으로
보아 MA는 month를 말하는 것 같다) 체중감소 (wt loss = weight loss) 7kg. DM은 무엇인지 모르겠다 (DM은
일반적으로는 당뇨병 – diabetes mellitus – 의 약자로 쓰지만 어머니는 당뇨병이 없었으므로
여기서는 다른 뜻인 것 같다). 식욕부진 (anorexia).
이를 바탕으로 담당의사가 의도했다고 생각한 것을 문장으로 만들어 보면 환자는 지난 3개월동안 음식을 먹은 뒤 상복부 통증이 있어 왔고 이로 인해 체중이 7kg빠졌으며 식욕도 떨어졌다.
담당의사가 영어로 썼으니 영어문장으로 바꾸어 보면, The patient complains of epigastric pain particularly after eating, which has been ongoing over the last 3 months. During this time, she has lost 7 kg and developed anorexia.
문장으로 쓰니 훨씬 이해하기 쉽지 않은가? 단어들만 나열하게 되면 시간이 지나서 다시 읽어볼 때 작성자 자신조차도 정확하게 이해하기 힘든 경우가 많다. 그래서, 미국에서 내가 본 모든 SOAP 노트들은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나도 문장으로 작성한다.
그런데, 이 기록은 정확할까? 우리나라 의료경험기 7에서 기술했듯이 7월 6일 방문에서 어머니가 의사에게 호소한 것들은 1) 항암제를 맞은 후 속이 더 안 좋아져서 더 이상 맞고 싶지 않다; 2) 거리가 멀어서 병원을 바꾸고 싶다; 그리고 3) 진통제, 위장관 운동 촉진제, 췌장효소제를 충분히 달라는 것이었는데 이는 하나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다음, Objective부분을 살펴본다. 담당의사는 Objective 부분에 세 가지 검사 (CT, 간과 췌장 조직, 췌장암 지표) 결과와 어머니가 2주전에 맞은 항암제 이름과 용량을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7월 6일 당일 어머니는 혈구수 측정 (Complete Blood Count - CBC) 등의 새로운 혈액 검사를 받았고, 담당의사가 그 결과를 우리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하지만, 이 기록은 빠져있다. 또, 미국의 SOAP 노트에는Objective 부분에 검사 결과 뿐만 아니라 바이탈과 촉진, 청진 등으로 의사가 수행하는 physical exam이라 불리는 검사결과도 함께 기록하지만 이 둘은 하지 않았으므로 기록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머니는 복수가 있었기 때문에 복부 physical exam을 해서 그 결과를 기록해 놓았으면 재진 때나 다른 의료진에게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다음, 평가와 계획 부분은 함께 묶어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이 노트에서도 Assessment & Plan로 함께 묶어 놓았듯이 둘은 논리적으로 서로 밀접히 연결되기 때문이다. 먼저, A)로 시작하는 평가 부분을 보자.
“panc Ca body 53mm with liver 2017. 6. 22 GemAbrax
PV invasion with E. varix
Ascites SAAG 3.8-1.4”
이를 Subjective부분에서 썼던 방법으로 풀어보면 환자는 췌장 (panc = pancreas)의 몸 (body) 부분에 크기 53 mm의 암 (Ca = cancer)이 있으며 이는 간 (liver)으로 전이되고 간문맥 (PV = portal vein)으로도 침윤 (invasion)되어 식도에는 정맥류 (E. varix = esophageal varices)가 발생되어 있다. 그리고, 복수 (ascites)가 있으며 혈청과 복수 알부민 농도 차이 (SAAG = serum to ascites albumin gradient)는 2.4 (= 3.8-1.4)였다. 또, 환자는 2017년 6월 22일에 Gemcitabine과 Abraxane을 맞았다.
“Reject chemo Tx BSC 진단서”
이는 아마도 “환자는 항암치료 (chemo Tx)를 거부했고 진단서를 달라고 요청했다” (BSC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다)인 것 같다.
평가부분에는 Objective부분에 들어가야 할 검사결과 (SAAG)가 들어 있어 혼동을 준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문제점 요약 (problem representation)이 들어가야 하는데 빠져 있다는 것이다. 임상 사고과정에 관한 이론 (clinical reasoning theory)에 의하면 주관적, 객관적 정보를 바탕으로 문제점을 어떻게 요약하느냐에 따라 진단과 치료방법이 달라질 수 있다. 이 문제점을 요약하는 능력은 비유하자면 흩어져 있는 여러 그림 조각들 (즉, 주관적, 객관적인 정보)을 하나로 묶어 보여줄 수 능력이다. 그런데, 주관적, 객관적인 정보에는 시그널도 있지만 노이즈도 많다.
왜냐하면, 환자가 호소하는 것들과 모든 검사 결과가 다 진단과 치료에 중요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그널만을 골라 내서 이를 종합적으로 묶어 요약해 낼 수 있는 능력 – problem representation - 은 의사에게 가장 중요한 임상적 기술 (skill) 중 하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학교 의과대학 레지던트 교과과정에서는 clinical reasoning과목과 임상 수련과정을 통해 문제점 요약 기술을 집중적으로 가르치고 연습시킨다. 그리고, SOAP 노트의 평가 부분을 쓸 때에는 문제점 요약을 반드시 포함시키도록 한다.
또, 계획은 평가를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즉, 평가에 따라 논리적으로 계획을 세워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노트의 평가 부분에서 암의 진행 정도를 언급하고 있는데, 계획 부분에서는 환자의 항암제 치료에 대한 결정과 진단서 발급 요구를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평가가 계획을 논리적으로 뒷받침하고 있지 않다. 또, 계획 부분에는 어떤 치료와 처방을 했는지, 환자 교육, 재진 계획 등도 기록해야 한다. 특히, 치료와 처방에 대한 기록은 작성자 본인 뿐만 아니라 환자를 보는 다른 의사들에게 치료 계획을 세우는 데 중요한 정보가 된다. 담당의사는 당일 진통제, 위장관 운동촉진제, 췌장 효소제 등을 처방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전혀 기록하고 있지 않다. 또, 복수에 관한 환자 교육도 빠져 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이 읽어 보면 환자는 항암치료를 거부하고 진단서만 받고 간 줄 알 것이다.
어머니가 호소한 것과 객관적인 정보를 바탕으로 문제점을 요약해 보았다.
P) 특별한 기저 질환은 없었지만 2주 전에 간 전이성 췌장암 진단을 받고 gemcitabine과 Abraxane을 시작한 73세의 여성 환자가 견딜 수 없을 것 같다면서 더 이상의 항암치료를 거부하고 집이 멀어서 다른 병원으로 옮기고 싶다며 의무기록를 요청한다 (또는 요청함).
73-year old woman with no significant past medical history who was diagnosed with pancreatic cancer with liver metastasis (stage IV) and received the first dose of the first cycle of gemcitabline and Abraxane 2 weeks ago refuses additional chemotherapy due to intolerance and requests medical records to transfer to another hospital due to long travel to the clinic.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계획을 다시 써 보면
P) 1. 항암치료를 중단한다. 대신 증상완화치료를 계속 진행한다:
- Tramadol
(진통제 이름) 25 mg 1 정 통증이 있을
때 매 6시간마다
-
Mosapride (위장관 촉진제 이름) 5
mg 1정 식전 30분전 하루 세 번
- 췌장 효소제 1 정 음식과 함께 하루 세 번
2. 체중이
24시간동안 1-2 kg 증가하면 병원에 연락하라고 교육함.
3. 병원 전원
요구에 따라 진단서 발급해 줌.
영어로 바꾸어 보면
P) 1. Stop chemotherapy. Continue supportive care:
- Continue tramadol 25 mg PO Q6h PRN for pain
- Start mosapride 5 mg PO TID 30 min before each
meal
- Start pancreatic enzyme formulation 1 tablet
TID with each meal
2. Patient educated to seek medical attention if
body weight increases by 1-2 kg over a 24-hour period.
3. Issued medical records per patient’s wish to
transfer to another hospital.
어머니는 외래로 담당의사를 세 번 만났기 때문에 다른 – 6월 22일과 6월 15일 -SOAP 노트도 읽을 수 있었다. 이 두 노트를 보고 왜 7월 6일자 노트에 어머니가 호소한 것들이 Subjective 부분에 기록되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6월 22일자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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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부정확하고, 불명확하고 비논리적인 문제점들은 단지 담당의사의 SOAP노트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나중에 이 블로그에서 따로 다루겠지만, 인턴이나 레지던트가 쓴 노트들도 비슷한 문제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어머니 병환 때문에 한국으로 들어오기 전, 우리과 교수 하나가 내게 다른 의사의 의견 (second opinion)을 받아 보는 것이 어떻겠냐며 자기한테 한국에서 받은 의무기록을 보내면 우리학교 병원의 종양내과 의사를 연결해 주겠다고 한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때 서울대 병원에서 받은 의무기록을 안 보내길 참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 이 SOAP 노트들을 보면서 이를 발행한 병원의 수준을 어떻게 보았을까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리기 때문이다.
양질의 의료에는 양질의 기록도 포함된다. 그렇기 때문에, 샌프란시스코 종합병원을 포함한 많은 미국 병원들이 의료진 평가 도구의 하나로 의료진이 작성한 SOAP 노트를 본다. 또, 양질의 기록은 양질의 의료진을 배출하는 데 필수적이다. 왜냐하면, 학생들과 수련하는 사람들은 선배들이 작성한 SOAP 노트를 읽으면서 그들의 임상적 사고과정을 배우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양질의 기록을 위해 병원과 학교들이 교육을 강화하고 제도적인 뒷받침을 해야 할 것 같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의무기록은 어머니의 허락을 미리 받아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