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전쟁 당시, 대구로 이전했다가 서울 명동에 자리 잡았던 국립극장은 1973년 남산 자락에 터를 잡아 신축 개관하고 현재에 이른다. 남산 이전 50주년을 기념하는 연말 기획 공연 <세종의 노래: 월인천강지곡>이 오는 12월 무대에 오른다. 국립국악관현악단과 국립무용단, 국립창극단 등을 비롯해 300여 명이 무대에 오르는 대규모 칸타타로, 손진책(연출)․박범훈(작곡, 지휘)․국수호(안무) 등 원로 예술가들이 진두지휘하는 대작을 만날 기회다.
즈믄 가람 비추는 달의 노래, 『월인천강지곡』은 책 세 권 분량의 찬불가(讚佛歌)다. 세종 임금이 먼저 떠난 소헌왕후 심씨를 위해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종의 아내이자 문종과 세조의 어머니이고 단종과 예종의 할머니이기도 했던 소헌왕후는 세종 28년인 1446년에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의 자택에서 유명을 달리한다.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지극했던 수양대군은 소헌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담은 『석보상절』을 편찬했는데, 세종이 그 내용에 맞추어 부처의 공덕을 노래로 읊은 것이 월인천강지곡이다. 상․중․하 세 권 중, 오늘날까지 전하는 것은 190여 곡이 실린 상권 그리고 중권의 낙장(落張) 몇 장뿐이다. 훗날 세조가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을 함께 엮어 『월인석보』를 간행함으로써, 월인석보에 실린 곡까지 모두 합해 440곡가량이 현전한다.
소헌왕후는 왕자였던 충녕군과 혼인해 8남 2녀를 두는 동안 세자빈이 되고 왕후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희대의 성군을 지아비로 두었으나 시아버지에 의해 친정이 숙청당하는 수모를 겪었고, 두 임금의 어머니이자 두 임금의 할머니이기도 하였으나 아들과 손자가 왕이 되는 것을 생전에 보지는 못하였다. 그의 사후에 일어난 골육상잔의 비극 역시 보지 못한 것은 차라리 다행이었다.
세조실록 총서의 첫 장을 읽어보면, 폭군으로 기억되는 세조의 이면과 아버지 세종과의 관계가 어떠했는지 등을 짐작해볼 수 있는 대목이 보인다.
활쏘기와 말타기가 고금에 뛰어났으며 역학, 산학, 음률, 의술, 기예 등이 모두 그 묘(妙)를 다하였는데, 이를 숨기고 남 위에 오르려 하지 않으니 세종이 이를 기특히 여기고 사랑하여 그 대우를 다른 아들들과 달리하였으며, 군국대사(軍國大事)에는 반드시 참여토록 하였다.
여러 가지 정황상 세종이 호전적이고 야심만만한 자신의 둘째 아들을 경계했을 것이라는 주장에 무게가 실리지만, 사서의 기록에는 아들의 능력과 재주를 인정하고 아끼는 아버지 세종의 면모가 드러나 있다. 음악과 관련한 기록들도 적지 않다. 세조가 악기를 연주하여 모두의 감탄을 자아냈고 세종이 이를 칭찬하였다는 내용, 세조가 귀신이 부는 퉁소 소리를 듣고 그 음높이를 맞추었다는 내용, 세종이 송나라 음악 이론가가 쓴 악서 『율려신서』를 보라고 권하며 “이러한 큰일은 네가 힘써야 한다”고 하는 내용 등은 세조가 음악에 조예가 깊고 재주를 타고났음을 보여주는 대목들이다.
음률에 밝았던 이들 부자가 함께 이루어낸 또 하나의 작품이 종묘제례악으로 쓰이는 음악 ‘정대업’과 ‘보태평’이다. 세종이 만들어 회례연 등에 일부 사용했던 악무(樂舞)를 세조가 국가의 대사인 종묘 대제를 치를 때 쓰는 음악으로 채택한 것이다. 이에 관해 『국조보감』 세조조에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세조가 처음 즉위하여 처음 종묘에 제사를 지내고 돌아와 음복연을 베풀며 보태평과 정대업의 춤을 보고 ‘이것을 보면 조종의 창업이 어렵고 세종의 제작이 거룩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하며, ‘세종께서 하늘이 내려준 성지로 여러 악무를 제작하셨는데, 이를 미처 쓰지 못하였으니 지금 일으키지 않는다면 폐기되고 말 것이다. 이 어찌 애석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이후 세조는 세종조의 정대업, 보태평에 악무를 추가하거나 가사를 바꿔 짓고, 악기 편성을 달리하는 등 음악을 여러 차례 정비해 절차에 맞는 제례악으로 탈바꿈시킨다. 세조 10년인 갑신년 1월 14일, 세조실록의 기사는 ‘임금이 종묘(宗廟)에 친히 제사하였는데, 새로 만든 정대업(定大業)ㆍ보태평(保太平)의 음악을 연주하였고, 그 의식은 이러하였다’ 하고 시작한다. 기사에는 종묘 제례의 절차가 방대한 분량으로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제사를 마치고 돌아온 임금은 신하들에게 술을 하사하며, ‘세종(世宗)의 유의(遺意)를 이루어 매우 기쁘다.’고 하였다. ‘내가 근래에 병이 들어 동작하기 어렵다. 의주(儀注)를 고쳐 될 수 있도록 간략하게 만들어 아뢰도록 하라.’고도 하였다. 그로부터 4년 후, 찬탈해 오른 왕위에 겨우 십 년 남짓 머물렀던 세조는 아들인 예종에게 왕위를 넘긴 다음날 세상을 떠났다.
패륜한 자의 마음과 그 자식이 지어 올린 음악을 들으며 제사상을 받았을 부모의 마음, 선대의 신위 앞에 꿇어 엎드렸을 그 속내까지, 무엇도 속속들이 알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쩌면 찰나의 잘못으로 그러하지 않았을까, 돌이킬 수 없었던 일을 그렇게나마 속죄하고자 한 것은 아닐까, 형제는 몰라도 부모만큼은 늙고 병들어 엎드린 자식을 애달피 여기지는 않았을까. 인간사의 내력을 짚어가다 보면 더없이 단정한 음악을 듣는 가운데에도 복잡다단한 생각들이 스치곤 한다.
송신례(送神禮)는 조상의 혼령을 보내드리는 절차다. 세조가 악을 짓고, 최항으로 하여금 노랫말을 쓰게 한, 송신하는 악의 마지막 구절은 이러하다. ‘내 발을 제겨디디고 멀리 바라보니, 공벽(空壁)이 아득하도다.’
<필자소개>
김보람 씨는 동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와 영상대학원 문화콘텐츠학과를 졸업했으며, 국립국악원에서 소식지 국악누리 제작을 담당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