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충우돌 시골소녀 상경기를 무대로 재구성 / 뮤지컬 ‘속속들이 모던한 밀리’
국내에서보다 외국에서 인기가 높은 뮤지컬 장르가 있다. 바로 코미디다. 공연장 나들이는 누구에게나 신나고 특별한 체험이고 그래서 모처럼 찾아간 뮤지컬 무대에서 왁자지껄 웃고 즐기는 체험은 비할 데 없는 추억이 되곤 한다. 영미권 공연가를 돌아보다보면 가장 흔히 등장하는 홍보 문구도 ‘Hilarious!’라는 표현이다. 공연장 주변 거리에 어느 언론사 혹은 평론가가 이런 표현을 썼다는 식의 자랑스런 홍보문구판을 자주 볼 수 있다. 우리말로 ‘아주 우습고 재미있다’는 표현이다. 배꼽 잡느라 혼났다 쯤으로 의역할만하다.
아더왕의 전설을 영국의 인기 코미디언 팀인 몬티 파이튼이 재구성한 영화 ‘몬티 파이튼과 성배’를 다시 무대로 탈바꿈시킨 ‘스팸어랏’, 몰몬교도 이야기를 촌철살인의 포복절도할 스토리로 재구성한 ‘북 오브 몰몬’, 무조건 망해야 성공할 수 있는 어느 기획자의 기발한 아이디어를 우스꽝스럽게 덧붙인 ‘프로듀서스’, 1960년대 발티모어를 배경으로 모든 종류의 선입견과 편견을 타파한다는 주제 속에 통통하고 귀여운 매력의 주인공 트레이시가 TV스타로 등극하는 이야기를 그린 ‘헤어스프레이’ 등이 2000년대 들어 큰 인기를 누렸던 대표적인 코미디 뮤지컬의 사례다. 신나고 웃고 박수치고 환호하는 재미를 만끽할 수 있는 부류의 작품들이다.
우리 관객들에겐 낯선 제목의 뮤지컬 ‘속속들이 모던한 밀리(Thoroughly Modern Millie)’도 빼놓을 수 없다. 1967년 만들어진 원작 영화를 무대화한 이 뮤지컬은 ‘모던하다’는 한마디에 목숨이라도 걸었던 1920년대 영미권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미국 시골마을인 캔자스시티 출신의 밀리는 뉴욕에 도착하자마자 고향으로 돌아가는 왕복 버스 티켓을 찢어버린다. 반드시 뉴욕에서 ‘모던’하게 성공해서 부잣집 사모님이 되겠다는 다짐을 이뤄내겠다 다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가 사랑을 경험하게 되는 것은 길거리에서 만나 ‘눈 감으면 코 베어간다’는 대도시의 현실을 일깨워주는 평범한 청년 지미다. 처음 희망대로 백만장자와 결혼하겠다는 밀리의 꿈은 이뤄질지, 지미와의 순수한 사랑을 또 어떻게 전개될지, 함께 여성들만 기거하는 호텔에서 지내던 절친 도로시의 행방불명에는 또 어떤 사연이 숨겨있는지가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한때 우리나라에서도 시골 소녀의 좌충우돌 서울살이가 인기 있는 대중문화 콘텐츠 혹은 TV 드라마로 대중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적이 있는데, 이 작품은 엇비슷한 줄거리의 ‘미국판 코믹 상경기’인 셈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뮤지컬 ‘속속들이 모던한 밀리’는 동명 타이틀 영화가 원작이다. ‘스팅’, ‘리틀 로망스’ 등을 연출했던 조지 로이 힐이 메가폰을 잡고, 주인공인 밀리 역으로는 ‘메리 포핀스’, ‘사운드 오브 뮤직’ 등으로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줄리 앤드류스가 등장해 대중들로부터 큰 인기를 누렸다. 영화는 당시 600만 달러의 제작비를 들여 4,000만달러의 박스 오피스 기록을 수립, 거의 7배에 가까운 잭팟을 터트렸던 것으로 유명하다. 스크린에서의 흥행은 오스카상 7개 부문의 노미네이션 그리고 최우수 작곡상의 수상을 기록하며 절정을 이뤘다. 작곡자는 스티브 맥퀸이 주연을 맡아 세계적으로 사랑받았던 영화 ‘대탈출’의 음악을 만들었던 엘머 번시타인이 참여했다. 무대용 뮤지컬에서는 영화를 위해 만들어진 번시타인의 음악들을 적절히 편곡하고 활용해 추억 속 콘텐츠의 화려한 부활을 완성시키는 묘미를 담아내기도 했다.
이제는 오히려 시대에 뒤떨어진 여성상으로 비춰질지도 모르지만 뮤지컬의 배경이 되는 1920년대 미국에서 여성이 도시로 찾아와 직업을 구하고, 남성에 의한 구애의 대상이 되는게 아니라 본인이 적극적으로 사랑을 찾아나선다는 내용은 이 작품이 등장했던 시기를 감안하자면 그야말로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이었다. 사실 당시 미국 젊은이들에게 ‘모던’이라는 말은 곧 현재하는 모든 질서로부터의 이탈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그래서 작품의 제목으로 쓰이고 있는 ‘속속들이 모던하다’는 문장의 의미는 ‘모던’하다는 말의 사전적 의미를 넘어 마치 하나의 유행과 감성, 또 신세대적 사고방식을 모두 새롭게 또 신선한 개념으로 받아들이고자했던 그 시기 미국 젊은이들의 시대적 상황과 분위기를 반영한 특별한 개념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작품 자체가 철학적 혹은 시대적 배경의 반영만 담고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오히려 뮤지컬로 다시 제작된 ‘속속들이 모던한 밀리’는 브로드웨이 코미디 뮤지컬의 전통을 그대로 잇고 있다고 평가받을 만한 완성도와 재미를 담아내 큰 화제가 됐다. 특히 관객으로 하여금 배꼽을 잡게 만드는 갖가지 세심한 연출들이 뮤지컬 곳곳에 배치돼 작품의 완성도를 높여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예를 들자면 가로로 등장했던 호텔 전광판이 중국어가 등장하자 세로로 뒤바뀌며 위에서 아래로 글을 읽는 중국식 활자문화를 재치있게 반영해 객석에서 폭소가 나오게 만든다던지, 사무실 여성 직원들에게 업무시간에는 다른 생각을 하지 말라 다그치던 미스 플래러니가 오히려 여성이라 공감을 가게 만드는 노랫말을 다른 여성 출연진들과 함께 부르며 몸매와 어울리지 않는 현란한 탭댄스 실력을 선보이는 극적 반전의 장면은 극장이 떠내려갈 듯한 폭소를 불러일으키는 재미를 선사해준다.
특히 이 뮤지컬의 대중적 인기는 기발한 아이디어에서 비롯됐다고 평가할만하다. 매 장면 무릎을 치게 만드는 발상의 전환이 무대를 보고 익살을 즐기는 재미를 극대화시키기 때문이다. 밀리가 꿈에 그리던 스타일의 보스 - 트레버 그래이든 사장을 만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비서로서의 업무처리 능력을 알아보려 사장의 말을 타이프로 받아치는 속도 테스트가 등장하는데, 일명 ‘스피드 테스트’(Speed Test)를 치르는 장면이 전개된다. 코믹한 무대적 표현은 변형된 탭댄스로 한층 웃음을 자아낸다. 즉, 타이프 치는 소리를 책상에 앉아 스텝으로 리듬을 두드리는 탭 댄스의 발 박자 소리로 대체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한 술 더 더해 타이핑된 편지를 속사포처럼 다시 읽는 트레버의 노랫말은 그 장면 자체로 객석으로부터 환호와 박수를 자아내는 익살과 해학을 담아내 미소짓게 만들기도 한다.
뮤지컬 ‘속속들이 모던한 밀리’는 굳이 형태적으로 구분해보자면 무비컬로 구분지을 수 있다. 하지만, 무대는 영화의 그것을 넘어 흥미로운 재창작의 노력을 더해 새롭고 참신한 무대적 기법의 활용을 통해 인기를 누렸다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린다. 유명 원작을 재활용할 때도 단순한 재연의 수준을 넘어 해체와 재구성을 통해 콘텐츠에 다시 새로운 생명력을 더해야 한다는 흥행 뮤지컬의 성공 방정식을 이 작품에서도 여실히 엿볼 수 있다. 최근들어 드라마나 영화 등의 무대화가 늘어나고 있는 우리 뮤지컬계의 입장에서도 곰곰이 곱씹어 생각해봐야할 흥미로운 뮤지컬 창작의 기본 공식이다.
원종원씨는 한국외대 재학 시절, 영국을 여행하다가 만난 뮤지컬의 매력에 빠져 활동을 시작했다. 뮤지컬 저변을 확대하고자 국내 최초로 PC통신을 통해 동호회를 결성, 관극운동을 펼쳤다. TV의 프로듀서와 일간지 기자,특파원을 거쳤으며, 현재 일간지와 경제지 등 여러 매체에 뮤지컬 관련 칼럼을 연재해오고 있다. 대학(순천향대 공연영상학과 ) 강단에 서고 있는 지금도 자타가 공인하는 뮤지컬 마니아이자 전문 평론가로 지면과 방송 등을 종횡무진 누비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