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이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멀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눈에 들기 시작할 때가 있다. ‘철부지 괴짜 아빠’ 다니엘도 마찬가지였다. 늘 함께라 생각했던 가족과 헤어져 홀로 남겨진 다니엘에게 눈앞의 현실은 반드시 되돌려야 할 숙제가 됐다. 결국 그는 뒤늦게나마 자신의 전부를 찾기 위해 위태로운 이중생활을 시작한다. 사랑스러운 세 아이의 아빠 다니엘이 아닌 사람 좋은 보모 할머니 다웃파이어 부인의 모습으로 말이다.
추억의 영화가 뮤지컬이 되어 돌아왔다. 크리스 콜럼버스 감독, 로빈 윌리엄스 주연 동명 영화를 바탕으로 탄생한 코미디 뮤지컬 ‘미세스 다웃파이어(Mrs. Doubtfire)’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1993년 개봉 당시 전미 박스오피스 11주 연속 1위를 차지했던 영화 ‘미세스 다웃파이어’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가족 간의 유대와 사랑 이야기를 유쾌하게 다뤄 큰 인기를 끌었다. 초보 아빠의 성장 스토리가 변장이라는 참신한 발상과 어울리면서 다양한 가족 형태를 포용하는 모습으로 나아가는데, 이는 뮤지컬에서도 고스란히 재현된다. 참고로 무대 위 다니엘이 다웃파이어 부인으로 변신하는 데는 약 8초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다고 한다. 쉴 틈 없이 전환되는 1인 2역 퀵 체인지가 무려 열여덟 번이나 이뤄진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2015년부터 기획개발을 시작한 뮤지컬은 2019년 미국 시카고 트라이아웃을 거쳐 2021년 말경 브로드웨이 무대에 올랐다. 그리고는 다음 무대로 한국을 택했다. 덕분에 우리는 청소기와 빗자루를 들고 신나게 춤추던 다웃파이어 부인을 뮤지컬의 본고장인 영국 웨스트엔드보다 한발 앞서 서울 샤롯데씨어터 무대에서 만날 수 있게 됐다.
뮤지컬 미세스 다웃파이어 공연장면 <사진제공 : 샘컴퍼니 >
의미 있는 초연인 만큼 출연진도 남다르다. 특히 다니엘과 다웃파이어 부인은 연기, 노래, 순발력 등 모든 부분에서 고난도의 실력을 요구하는 배역이다. 영화 속 다웃파이어 부인과 비슷하면서도 배우의 개성이 고스란히 살아있는 무대를 선보여야 했는데 이번 시즌 주연을 맡은 임창정과 정성화, 양준모가 그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해내고 있다. 여기에 신영숙, 박혜나, 김다현, 김산호, 김나윤, 박준면, 임기홍, 육현욱이 함께해 빈틈없는 무대를 선사하고 김태희, 설가은 등을 포함한 실력파 아역배우들이 작품을 더욱 탄탄하게 완성한다.
뮤지컬 ‘미세스 다웃파이어’는 영화에 담긴 재미와 감동을 그대로 가져오면서도 일부 설정은 무대극에 어울리게 바꾸고 한국 관객의 취향에 맞춰 대사를 수정했다. 우선 다니엘의 아내 미란다는 잘 나가는 인테리어 디자인 업계 커리어 우먼 대신 현실적인 고민을 가득 품은 의상 디자이너가 됐다. 그리고 미란다의 친구이자 사업 파트너 스튜어트 역은 피트니스 클럽 체인을 운영하는 대표로 변신했다.
다니엘이 ‘다웃파이어’ 부인이 된 배경에는 길거리를 지나던 남녀의 대화가 주요하게 작용했는데, 짧은 장면이지만 제대로 웃음 터지는 대목 중 하나가 바로 여기다. 이뿐만 아니라 요즘 우리 사회를 울고 웃게 만드는 요소들이 작품 곳곳에 담겨 있어 만개한 웃음꽃이 질 겨를이 없다. 이는 뮤지컬 ‘썸씽로튼’을 만든 존 오페럴과 커크패트릭 형제가 각각 극본과 음악을 맡으면서 특유의 유머러스한 분위기를 작품 전반에 펼쳐둔 덕분이다. 그래서인지 작품에는 ‘썸씽로튼’을 닮은 장면들이 반갑게 눈에 띈다. 또 자칫하면 어색해질지 모를 이야기를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우리말로 옮긴 번역가 황석희의 노력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아마도 창작진들이 만든 전작을 보았다면 순간순간 연상되는 장면 때문에 더 즐겁게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미란다의 남편이자 사랑스러운 세 아이의 아빠이기도 한 다니엘은 그저 가족들과 즐거운 일상을 보내는 일이 낙인 인물이다. 하지만 열다섯 큰딸 리디아마저 아빠는 과연 언제 철이 들까 걱정할 정도로 현실 감각이 없다. 타고난 재능 덕분에 성우로 일해왔지만, 또 타고난 성격 탓에 매번 마찰을 빚고 만다. 애드리브 문제로 방송국에서 해고당한 그는 평소처럼 별다른 생각 없이 아들 크리스의 생일파티를 요란하게 챙겨주다 미란다의 화를 돋운다. 지쳐버린 미란다가 결국 이혼을 선언하고, 두 사람은 법정에 선다. 다니엘이 공동 양육권을 사수하려면 3개월이라는 유예기간 동안 많은 것을 바꿔야 했다. 그러다 미란다가 보모를 구할 계획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다니엘은 자신이 가진 재능을 바탕으로 위장취업을 감행한다. 그 뒤 다니엘이 아닌 미세스 다웃파이어가 되어 가족들과 만나는 과정이 좌충우돌 스펙터클한 일상으로 그려진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만나기 위해 막다른 골목에서 아찔한 이중생활을 감행한 아빠의 모습은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여전히 뭉클하고 감동적이다. 언제나 위한다고 생각했지만, 헤어지고 나서야 미처 살피지 못한 아내의 마음을 알게 되고 변화하겠다 마음먹는 다니엘이 낯설지 않게 다가오는 이유는 아마도 그런 감정에 진심으로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작품은 이렇게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이 맡은 역할을 다함으로써 사랑을 전하는 모두를 향해 다시 한번 곁을 돌아볼 계기를 무겁지 않게 전달한다.
온 가족이 함께 즐기기 좋은 뮤지컬 ‘미세스 다웃파이어’는 오는 11월 6일까지 계속된다. 언제 어디서나 통하는 보편적 진리가 얼마만큼 새롭고 재미있게 전달될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다면 이번 가을, 다웃파이어 부인의 깜짝 비밀이 숨겨진 힐러드 가를 방문해보시길 바란다.
<필자소개>
최윤영씨는 인천국제공항 아나운서와 경인방송 라디오 리포터 등 방송 활동과 더불어 문화예술공연 전문 진행자로 다양한 무대에 선바 있다. 현재는 미디어 스피치 커뮤니케이션 교육을 담당하고 있으며 고려대학교 언론대학원 졸업 후 공연 칼럼니스트로서 칼럼을 기고해왔고, 네이버 오디오클립 ‘최윤영의 Musical Pre:view’ 채널을 운영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