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여름 개봉한 블록버스터 중 가장 관객들을 실망시켰던 작품은 ‘외계+인 1부’였을 것이다. 최동훈 감독의 첫 번째 SF영화라는 타이틀과 캐스팅만으로 제작 당시부터 화제가 되었던 이 영화는 개봉 후, 관객들의 혹평 속에 극장가에서 급속히 사라져갔다. 1부라는 한계를 감안하더라도 복잡한 이야기를 잘 풀어주지 않는 불친절한 내러티브, 관객들이 감정을 이입해야 할 중심 캐릭터의 부재 등은 상업영화로서 커다란 단점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CG를 비롯한 프로덕션의 수준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뒤지지 않을 만큼 훌륭했으며, 그 중에서도 음악의 역할과 존재감은 재조명될 필요가 있다. 서울 도심 한 복판에 외계인과 로봇, 비행접시가 출현에 전투를 벌이는 영화, 고려를 배경으로 도사와 신선이 출몰하기도 하고,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며 무협물과 어드벤쳐, SF 장르까지 뒤섞여 있는 ‘외계+인 1부’의 음악은 장영규 감독이 맡았다. 그는 이미 ‘전우치’(최동훈, 2009) 때 최동훈 감독과 호흡을 맞추며 호평받은 바 있으나 훨씬 까다로웠던 이번 작품에서 더 세련된 음악을 선보였다. 기존 한국영화에서 레퍼런스가 없는 만큼 당혹스럽기도 했겠고, 142분의 러닝타임 내내 거의 음악이 끊이지 않을 만큼 방대하기도 한 작업을 매끄럽고 능숙하게 처리해낸 데서 장영규 감독의 관록이 느껴진다.
록밴드 베이시스트 출신에 소리꾼들과 함께 이날치 밴드를 만든 그가 아니었다면 과연 이 영화의 음악을 이처럼 완성도 높게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 싶다. 이질적 이미지와 장르가 한 장면에 담기는 만큼 시퀀스별로 다른 악기나 리듬을 사용하기 보다 그 장면이 가진 시각적 스펙터클과 액션의 리듬을 이용하고, 극적 호흡을 조절하는데 집중한 부분이 돋보인다. 전반적으로 SF 영화에 많이 나오는 의성음악(imitative music)이나 영상을 철저히 뒷받침하는 음악(underscore music)을 사용한 것 같으면서도 곳곳에 길고 짧은 멜로디를 삽입시켜 청각적 단조로움을 깨뜨렸다는 점도 주목해볼 만하다. 음악에 집중하면서 관람한다면 평가가 훨씬 높게 나올 수 있을 만한 작품이다.
윤성은의 Pick 무비 /
당신은 문학을 사랑하나요?, ‘9명의 번역가’
베스트셀러 ‘디덜러스’의 마지막 시리즈 출간을 위해 9명의 번역가가 한 저택으로 모인다. 출판사 사장인 ‘에릭’은 엄청난 돈을 벌어들일 ‘디덜러스’의 결말이 유출되지 않도록 번역가들을 커다란 저택의 지하에 가두고 인터넷 환경으로부터 차단시킨다. 그러나 유출 방지에 만전을 기했던 책의 첫 10페이지가 인터넷에 공개되고, 돈을 보내지 않으면 다음 100페이지도 공개하겠다는 협박 문자가 에릭에게 도착한다. 에릭은 번역가들 중에 범인이 있다고 확신하고 범인 색출 작업에 총력을 기울인다. 번역가들은 저마다 수상한 점을 갖고 있지만 물증은 누구에게서도 발견되지 않고, 결국 ‘디덜러스’의 원고는 순차적으로 인터넷에 공개되고 만다.
‘9명의 번역가’(감독 레지스 로인사드, 2020)는 ‘다빈치 코드’의 작가 댄 브라운이 ‘인페르노’를 출간할 때 번역가들을 지하 벙커에 가두었던 사건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각기 다른 언어를 할 줄 아는 번역가들이 모이고, 밀실에서 원고가 유출된다는 초반 설정은 꽤 흥미롭다. 플롯도 고민을 한 흔적이 보이는데, 영화는 범인을 추적해나가는 순행적 구성을 기본으로 하되, 그 중간 중간에 사건이 종결된 후 에릭이 교도소에서 범인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들을 삽입시킨다. 처음에는 에릭의 정면 샷으로 에릭이 범행 과정을 추궁하는 모습만 보여주다가 나중에는 범인의 얼굴이 공개되고, 그가 사건의 전말을 밝히면서 영화는 종결된다. 그러나 구미를 당기는 초반 설정에 비해 관객들이 함께 추리해 나가는 재미를 주기에는 연출이 다소 부족하고, 한 명 한 명에 개성을 부여하려 노력한 데 비해 9명의 번역가 캐릭터들도 미완성으로 느껴지며, 배우들 사이의 합도 아쉽다.
그래서 추리물로서의 매력보다는 영화의 주제에 더 주목하게 된다. 번역은 이미 쓰여진 문자언어를 다른 언어로 옮기는 행위지만 그 과정에서 반드시 번역가의 재창작 활동을 수반한다. 번역가들은 사실상 두 개의 언어를 다룰 줄 아는 작가들이라고 할 수 있다. 문학을 한낱 사업 아이템으로 밖에 보지 않는 에릭은 그런 번역가들을 강압적으로 밀실에 가두고 가드들을 배치시킴으로써 기능공으로 전락시킨다. 범인은 에릭의 태도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범행을 계획하고 차근차근 실행시킨다. 범행을 돕는 이들 또한 번역이라는 작업 및 번역가의 인권 문제에 대해 동일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 후반부에는 에릭의 조수까지도 에릭을 배신하는데, 영화 중반부에 그녀가 에릭에게 ‘문학을 사랑한다’고 말한 것은 그녀 행위의 복선이자 영화의 주제와 직결된다고 할 수 있다.
봉준호 감독의 ‘옥자’에는 ‘통역은 신성한 것이다’라는 대사가 등장한다. 번역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영화에서는 다소 코믹한 뉘앙스로 사용되었지만 이후, ‘기생충’(2019)의 번역가(달시 파켓)와 ‘기생충’ 캠페인 때 그를 도왔던 통역가(샤론 최)가 일약 스타가 된 것은 그의 이런 생각 덕분이 아니었을까. 문제가 출판사에 있는 것만은 아니다. 김성신 출판평론가는 지금이 ‘독자는 없고 소비자만 있는 시대’라고 말한다. 애초에 에릭 같은 인물을 만들어 낸 것은 대중들일 수도 있다. 장르적 재미보다 문학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에 주목해 볼 때 더 의미가 있는 작품이다.
<필자소개>
윤성은씨는 영화평론가이자 방송인으로 현재 다양한 매체에 영화음악 칼럼과 짧은 영화소개 글을 기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