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종원의 커튼 콜 
천재 화가의 비극적 삶을 무대로 만나다_뮤지컬 빈센트 반 고흐
편집부 기자 news@yakup.co.kr 뉴스 뷰 페이지 검색 버튼
입력    수정 최종수정 2022-05-20 10:04
천재 화가의 비극적 삶을 무대로 만나다_뮤지컬 빈센트 반 고흐

학창시절 배낭여행으로 들렸던 남부 프랑스의 프로방스 지방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작열하는 태양이 정말 시간을 멈춰버릴 듯한 느낌 때문이다. 주도인 엑상프로방스를 중심으로 개성 넘치는 아름다운 도시들이 이어지며 관광객의 발길을 유혹한다.

많은 유럽의 지역들이 그렇지만, 종교와 왕권이 대립하던 유럽 역사와 관계된 장소를 찾아돌아보는 것은 재미있는 여행방법이다. 유럽사에서는 한때 군주가 종교를 넘어서는 힘을 얻어 두 명의 교황이 존재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 프로방스 지방엔 왕이 임명한 ‘또 다른 교황’이 머물렀는데, ‘아비뇽 유수’로 잘 알려져 있는 도시 아비뇽이 그 배경이다. 공연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아비뇽 연극제’로도 유명한데, 축제가 열릴 때면 아비뇽의 교황청을 중심으로 오래된 시가지와 길거리에 가득한 인파 속에 휩싸여 실험적이고 도전적인 공연들을 여럿 만끽할 수 있다. 아름다운 항구도시 마르세이유에서는 해산물 요리인 ‘부이야베스’를 즐길 수 있고, 님의 고대 원형경기장을 찾아 투우를 관람할 수도 있다. 



그래도 프로방스에서 가장 잊지 못할 도시를 한 곳만 꼽으라면 아마 아를일 것이다. 지중해를 향해 도도히 흐르는 론 강을 중심으로 전형적인 남부 프랑스의 정취를 느낄 수 있어 일년 사시사철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다. 아를은 특히 그림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각별한 곳이다. 바로 고흐가 말년을 보냈던 도시이기 때문이다. 거리를 걷다보면 정말 고흐의 그림 속 풍경 같은 정취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쇠구슬 놀이인 페탕크를 하는 사람들, 뜨거운 햇볕 아래 강렬함을 뿜어내는 해바라기 등을 넋 놓고 바라보다보면 정말 누구라도 예술적 영감을 자극받을 것 같은 감흥에 휩싸인다. ‘스태리 스태리 나잇’이란 첫 소절 노랫말로 유명한 돈 맥클린의 노래 ‘빈센트’와 FM 라디오 프로그램 제목으로 쓰였던 ‘별이 빛나는 밤’의 진짜 배경인 좁다란 골목길 레스토랑, 또 빨래하는 처자들이 있던 랑글루아 다리 등은 위대한 천재화가의 흔적을 직접 만날 수 있는 감동이 살아 숨 쉬는 곳이다. 굳이 고흐의 맹렬한 추종자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흥미롭고 이색적인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프랑스 여행의 백미다.

요즘 우리 공연가에 프로방스와 아를, 그리고 고흐를 만날 수 있는 뮤지컬 한 편이 큰 인기다. 창작 뮤지컬 ‘빈센트 반 고흐’다. 비운의 화가였던 빈센트와 화상(畵商)이었던 테오, 단 두 명의 배우가 100분가량 무대 속 이야기를 통해 고흐의 작품과 예술세계, 비참했던 생애와 눈물 자아내는 죽음을 절절히 펼쳐낸다. 형 빈센트와 동생 테오는 실제로 700여통이 넘는 편지를 주고받을 정도로 형제애가 두터운 사이였는데, 뮤지컬에서는 이를 마치 2인칭 관찰자 시점처럼 상황을 구현하며 객석의 호기심을 충족시켜 준다. 형의 자살 이후 마치 시들어가는 꽃잎처럼 시름시름 앓다가 마침내 형처럼 세상을 떠나는 테오의 모습에 객석 곳곳에서 흐느낌이 들리는 것은 이 작품이 그만큼 대중적 소구와 감성적 공유에 효과적인 완성도를 이뤄냈음을 미루어 짐작케 한다. 

전술했듯이 무대에는 단 두 명의 배우만 등장한다. 하지만 뮤지컬에 나오는 인물은 이들만이 아니다. 물론 테오가 선보이는 1인 다역의 멀티 캐릭터도 인상적이어서 다양한 캐릭터들이 마치 등퇴장한 듯한 재미를 쏠쏠히 즐길 수도 있지만, 그보다 더 큰 비중을 지닌 제 3의 주인공이 또 있다. 바로 고흐의 작품들이다. 처음 공연장에 들어서면 하얀 세트만이 덩그러니 놓여있어 밋밋하게 보이기까지 하지만, 그러나 극이 시작되면 다양한 색감과 이미지들로 치장되며 화려하게 변신한다. 3D 매핑 기술을 활용해 황량해보이던 무대 세트에 수십 점에 이르는 고흐의 작품들을 쉬지 않고 투사시키기 때문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돌출되는 간단한 세트 이동을 활용해 단순히 이미지의 투영만이 아니라 입체적인 공간 감각을 구현해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유명한 그림 ‘아를의 침실’에 그려진 바로 그 가구가 무대에서 실재하는 듯한 이미지로 재현되기도 한다. 정말 아를에 있는 그의 방에 들어선 것 같은 착각마저 든다. 그림 속 인물의 표정 변화나 재배치의 재미를 통해 작품과 작가간의 교류를 형상화하는 장난스런 표현도 흥미롭다. 비주얼적인 완성도만 보자면 가히 뮤지컬을 통한 미술 관람이라는 색다른 즐거움으로도 인정할만하다. 물론 극 전개에 따라 작품의 탄생이나 뒷이야기 등도 함께 이해할 수 있어 매력적이다. 

뮤지컬의 초반부에선 그림을 활용해 이미지를 완성해내는 비주얼적인 볼거리가 관심을 끈다면, 중반 이후부터는 묵직한 스토리의 힘이 감동을 자아낸다. 예술에 대한 열정이 대중으로부터의 외면받자 점차 정신적 방황을 겪게 되는 모습이나 높은 도수로 악마의 술이라 불렸던 압상트에 얽힌 일화들, 고갱과의 만남과 좌절, 스스로 귀를 잘라버린 유명한 사건 등이 무게감 있게 펼쳐진다. 장면 장면마다 시대를 잘못 태어난 천재 화가의 심리적 갈등과 방황이 안타깝다. 극적 상상력이 이야기의 재미를 높여주기도 한다. 결국 스스로의 환각에 싸여 잘못된 삶의 선택을 하는 과정에 대한 묘사는 단연 압권이다. 광기에 싸여 세상을 노래하던 그가 무대 뒤편으로 사라지고 총소리와 함께 너른 벌판위로 날아오르는 까마귀 무리가 하얀 세트를 가득 메운다. 흡사 아키로 쿠로사와 감독의 영화 ‘꿈’에서 고흐의 작품들 속으로 들어가 그와 만나는 주인공의 마음까지도 연상케 한다. 

아를에 가면 정말 고흐의 그림과 똑같이 꾸며놓은 장소도 있다. 화려한 색감과 강렬한 이미지를 그림 속 풍경 그대로 고스란히 재연해놓은 생폴 정신병원의 앞마당 정원이다. 고흐 그림의 강렬한 색채가 정원의 화초들에 똑같이 채색돼 방문객들의 눈길을 끈다. 고흐가 바라봤던 세상의 빛깔이 정말 그림 속 이미지와 엇비슷했을 것이라는 추론의 반영이다. 정신병의 영향이거나 압상트로 인한 알콜 중독이 빚어낸 환각이라는 설도 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의 진위여부를 따지는 것보다 쓸데없는 호기심도 세상엔 없을지 모른다. 그저 그가 머물고 생활하며 그림을 그렸던 그 벌판과 거리, 자연을 거닐며 뮤지컬을 통해 만났던 장면들과 선율을 떠올려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동 넘쳐날 체험이기 때문이다. 무대로나마 그 감흥을 맘껏 즐겨보길 추천한다. 

<필자소개>  
원종원씨는 한국외대 재학 시절, 영국을 여행하다가 만난 뮤지컬의 매력에 빠져 활동을 시작했다. 뮤지컬 저변을 확대하고자 국내 최초로 PC통신을 통해 동호회를 결성, 관극운동을 펼쳤다.  TV의 프로듀서와 일간지 기자,특파원을 거쳤으며,  현재 일간지와 경제지 등 여러 매체에 뮤지컬 관련 칼럼을 연재해오고 있다. 대학(순천향대 공연영상학과 ) 강단에 서고 있는 지금도 자타가 공인하는 뮤지컬 마니아이자 전문 평론가로 지면과 방송 등을 종횡무진 누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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