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디밭이 가장 신선한 초록빛으로 물드는 5월이다. 요맘때면 가정의 달이라는 문구와 함께 생각나는 영화 포스터가 하나 있다. 푸른 하늘과 알프스를 배경으로 두 팔을 펼친 한 여인의 미소가 그 배경과 분위기를 잘 압축하고 있는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로버트 와이즈, 1965)의 포스터다. 약 세 시간에 달하는 이 영화는 1938년 나치에 병합된 오스트리아를 탈출해 미국으로 망명한 ‘본 트랩’ 가족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수녀가 되려고 했던 ‘마리아’(줄리 앤드류스)가 ‘조지 본 트랩’(크리스토퍼 플러머)의 집에 가정교사로 들어가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쳐주다가 조지와 사랑에 빠져 결혼한 후 스위스로 망명하는 내용이다.
이 작품은 아마도 역사상 가장 많은 히트송을 낸 뮤지컬 영화일 것이다. 마리아가 아이들에게 음계를 가르쳐주기 위해 부르는 ‘도레미송’, 천둥번개 치는 날 아이들을 안심시켜주었던 ‘마이 페이보릿 씽’(My Favorite Thing), 사랑에 빠진 큰 딸 ‘리즐’(차미언 카가)이 부르는 ‘식스틴 고잉 온 세븐틴’(Sixteen Going on Seventeen), 아이들이 자러 가기 전에 파티에 온 손님들에게 불러주는 ‘소 롱 페어웰’(So Long Farewell) 등 쉽게 흥얼거릴 수 있는 넘버만 해도 여럿이다. 그 중에서도 영화가 끝날 때쯤, 조지 대령이 무대에서 가족들, 관중들과 함께 부르는 ‘에델바이스’는 수십 년 동안 대중들에게 사랑받아온 유명한 노래다.
‘사운드 오브 뮤직’의 인기와 더불어 잘못 알려져 있는 바와 달리, 에델바이스는 오스트리아 민요가 아니라 영화의 원작이 된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위해 리처드 로저스와 오스카 해머스타인 2세가 새로 만든 곡이다. 두 사람은 아홉 개의 작품을 함께 하면서 토니상 35개, 아카데미상 15개를 비롯해 퓰리처상, 그래미상, 에미상 등을 동반 수상해 뮤지컬계의 전설적인 콤비로 꼽힌다. 뮤지컬 ‘사운드 오브 뮤직’은 해머스타인 2세의 유작으로, 안타깝게도 그는 뮤지컬 넘버들이 삽입된 영화의 개봉은 보지 못하고 사망했지만 영화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음악상을 수상한다.
‘사운드 오브 뮤직’의 삽입곡들은 한 곡 한 곡의 음악적 완성도 뿐 아니라 가사가 뮤지컬 영화에서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 잘 보여준다. 영화를 보고 나면 우울할 때마다 장미꽃의 빗방울, 새끼고양이의 수염과 따뜻한 털장갑을 떠올리게 되고, 뻐꾸기 시계가 ‘쿠쿠’ 하고 정각을 알릴 때 종종 자러 가기 싫어하는 아이들의 아쉬운 재잘거림이 들려오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가사만으로 문학적 가치가 있을 만큼 시적인 표현들과 라임은 원어에 잘 표현되어 있다. 좋은 가사들은 또한 배우들의 감수성과 극적 분위기를 돋우는 역할을 하는데, 깨끗하고 밝은 꽃 한 송이에 나라의 안위를 부탁하는 에델바이스는 그 좋은 예다.
나들이가 쉽지 않은 올 가정의 달에는 아이들과 함께 가사를 음미하면서 다시 한 번 ‘사운드 오브 뮤직’을 감상하는 건 어떨까.
윤성은의 Pick 무비
추억을 벗삼아 살아가는 당신에게, ‘비와 당신의 이야기’
억지로 마음을 다잡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가도 한 줌 햇살이 책상에 드리우면 다시 마음이 심숭생숭해진다. 외출도 만남도 자제해야 한다는 비극을 잊기에 5월의 햇빛은, 바람은, 나뭇잎들은 너무 잔인하다. OTT에 올라오는 신작보다 이번 주 개봉영화에 무관심하게 된 지도 어느덧 1년, 하지만 이렇게 반짝이는 봄날엔 영화관 데이트의 추억을 떠올리며 다시 큰 스크린을 그리워하는 이들도 있지 않을까.
‘비와 당신의 이야기’(조진모, 2020)는 부활이 1986년에 발표한 노래와 동명의 제목을 사용함으로써 그 유전자가 향수, 낭만, 사랑 등의 단어로 이루어져 있음을 천명한다. 시간적 배경은 사실 그렇게 멀지 않은 과거, 21세기 초반이다. 핸드폰이 한창 나오던 시절도 아날로그적 감성을 품고 있다면 정말 시대가 빨리 변하고 있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겠다. 무미건조한 생활을 하고 있는 삼수생, ‘영호’(강하늘)는 초등학교 운동회 날 달리기를 하다가 넘어진 자신에게 손수건을 건넸던 한 소녀를 잊지 못한다. 몇 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그는 급기야 그녀의 소재지를 알아내 편지를 쓰기로 한다. 부산에 살고 있는 소연은 사실 영호가 기억나지 않는데다 편지를 쓰기 어려운 상태지만 동생 ‘소희’(천우희)가 대신 답장을 해주면서 본격적으로 두 사람, 아니 세 사람의 펜팔이 시작된다.
‘비와 당신의 이야기’는 소소한 청춘들의 일상으로 채워져 있는 영화다. 운명, 가능성, 기다림에 관한 대사들이 계속 나오기는 해도 일반적인 연애담은 아니다. 두 남녀의 설레는 투 샷을 기대하는 이들에게는 실망스러울 수밖에 없다. 로맨스는 정작 이 영화의 수많은 레퍼런스들이 이끄는 관객들 개개인의 추억 속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영호가 소연을 만났던 수돗가는 꼬마들의 깜찍한 키스가 나왔던 ‘위대한 유산’(알폰소 쿠아론, 1998)의 수돗가를, 손편지와 특수한 삼각관계는 ‘러브레터’(이와이 슌지, 1995)와 ‘클래식’(곽재용, 2003)을 떠올리게 한다.
우산을 파는 영호의 직업과 비오는 날들의 이미지는 희미하게나마 ‘쉘부르의 우산’(자크 데미, 1964)과도 연결된다. 유명한 멜로드라마들의 차용은 두 주인공의 은근한 감정을 관객들 스스로 고조시키게 만드는데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특정한 감성을 공유하는데 이미 그것을 담고 있는 고전 콘텐츠를 차용하는 것만큼 효과적인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국영의 죽음까지 소환한 것은 다소 게으르게 느껴진다. 장국영은 풀 대신 본드를 사용한 것처럼 무심히 소비되기에는 너무 강렬한 재료이기 때문이다.
내용물 보다는 포장지가 고급스런 작품이지만 받는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다면 목적은 이룬 셈 아닐까. 유독 치열하고도 서툴렀던 청춘의 한 페이지가 자주 떠오르는 이들이라면 만족할 만한 작품이다.
윤성은씨는 영화평론가이자 방송인으로 현재 다양한 매체에 영화음악 칼럼과 짧은 영화소개 글을 기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