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심창구 서울대 명예교수53년전 이야기이다. 내가 다니던 제물포 고등학교의 졸업 예정자 중 11명이 Y대 의대의 입학시험을 쳤는데, 그 중 9 명이 합격하고 나를 포함한 2 명이 떨어졌다. 내가 떨어진 것은 수학 때문이었다. 출제된 주관식 10 문제 중 끝까지 제대로 푼 문제가 없었으니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대학 입시에 떨어진 후 서울 광화문에 있는 세종학원이라는 곳에 다녔다. 인천에서 경인선을 타고 통학하였다. 그런데 옆에 앉은 동료 재수생들을 보니 그들의 실력이 생각보다 너무 낮았다. 이런 곳에서 계속 공부를 해서는 안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었다. 그래서 그 해 9월, 최고의 입시 명문으로 소문난 양영학원 (종로 1가 소재)의 편입 시험에 도전하였다. 대여섯 명을 뽑는데 수백 명이 몰려 올 정도로 편입 경쟁률이 높았지만, 하나님 은혜로 이 시험에 합격하였다.
양영학원에 들어가 보니 명성에 걸맞게 학생들의 실력도 높았다. 내가 첫 수학 시험에서 겨우 20점인가 30점을 받을 때 무려 90점을 받는 학생도 있을 정도이었다. 학생 중에는 제1지망 학과에는 떨어졌으나 제2지망 학과에는 합격한 서울대 학생들도 제법 있었다.
다시 1지망 학과에 도전하고자 재수를 자원한 학생들이었다. 나는 내심 기가 죽어 그저 열심히 해야지 하는 마음뿐이었다. 인천에서 통학하는 시간이 아까워 청계천 변에 있는 독서실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주야로 공부만 하였다.
양영학원의 수학 선생님 K는 정말로 수학을 잘 가르치시는 분이셨다. 고등학교 때 수학 선생님은 내가 소화하기에는 벅찰 정도로 방대한 양의 문제를 풀도록 지도하는 분이셨다. 그래서 내게 수학은 언제나 정리가 잘 안 되는 어수선한 과목이었다.
그런데 양영학원에 가 보니 우선 수학 문제집의 두께가 매우 얇았다. 문제집에 실린 문제수도 고등학교 때 풀던 문제수의 10분의 1 정도 밖에 안되었다. 그런데도 K 선생님은 ‘이 문제들만 제대로 풀 수 있다면 입시에 어떤 문제가 나와도 다 풀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하셨다.
이 정도의 양이라면 나도 소화해 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K 선생님의 문제 풀이는 더할 수 없이 간결 명쾌해서 이해하기 쉬웠다. 칠판에 써 주시는 답 풀이는 대개 서너 줄을 넘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점차 수학 공포증에서 벗어나 수학의 원리에 눈을 뜨게 되었고, 마침내 그 해 12월에는 수학이 가장 자신 있는 과목이 되어 있었다.
그 선생님 덕분에 나는 1967년 서울대 약대 입시에서 경이로운 수학점수를 얻었다. 주관식 열 문제가 출제되었는데 시험지를 받자마자 일필휘지(一筆揮之)로 아홉 문제를 풀었다. 그 순간 “아홉 문제를 풀었거든 열 번째 문제 풀이에 도전하지 말고 풀은 문제를 검산하라”고 하신 고등학교 수학 선생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그래서 아홉 문제의 풀이를 하나하나 차분히 검산해 보았다. 그랬더니 아홉 문제 모두 한 점도 고칠 곳이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풀려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열 번째 문제 풀이에 도전해서 수학 만점이라는 기록이나 한번 세울 걸 하는 아쉬움마저 들었다.
결국 그 어렵다는 수학에서 무려 90점을 받은 덕택에 나는 재수 1년 만에 서울대 약대에 수석으로 합격하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모두 K 선생님의 가르침 덕분이다. 이 체험으로부터 나는 선생님이 잘 가르치는 것이 학생 교육에 엄청나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훗날 내가 교수가 되었을 때 ‘나는 과연 잘 가르치고 있는가’를 자문(自問)하곤 하였다. 그 때마다 실력이 부족해 충분히 잘 가르치지 못하는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나는 대학의 교육의 질도 교수의 실력에 의해 좌우된다고 믿는다. 아무리 학생이 우수하고, 시설이 좋고, 커리큘럼이 화려해도 가르치는 사람의 실력이 없으면 결코 교육의 질이 높아질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최고로 실력 있는 교수를 채용하는 것이 대학 발전의 지름길’ 이라고 확신한다.
끝으로 정년이 지나고 나서야 이런 이야기를 강조하는 나의 비겁함을 용서해 주시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