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서울병원에서 입원수속을 마치고 병실을 배정받자 마자 간호사가 들어왔다.
“환자 보호자분이세요? 저는 담당 간호사인데 환자에 대해 좀 여쭤볼 게 있어서요.”
간호사는 나를 nursing station으로 데리고 갔다. 널찍한 nursing station은 금요일 오후 5시가 지나서인지 북적거리지 않고 비교적 한가했다. 간호사는 30분정도는 걸릴거라고 의자를 주면서 앉으라고 권했다. 처음에는 간호사가 환자에 대해 알아볼 것이 그렇게 많이 있을까하고 의아해했지만 간호사의 질문을 들어 보니 곧 이해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간호사는 어머니의 병력, 가족력, 약력에 대해 정말 자세하게 물었기 때문이다. 서울대 병원에서 진단받은 날짜, 그동안 받은 치료 내역, 지금 복용하고 있는 약 등을 꼬치꼬치 묻고는 전자차트에 꼼꼼히 기록했다.
미국 병원에서는 환자가 입원하면 담당의사가 H&P (history & physical)이라는 입원의무기록을 작성해야 한다. 이 H&P에는 환자의 병력, 가족력, 약력, 치료 내역, 청진/촉진 검사기록, 피검사/요검사/영상검사기록, 그리고 이런 정보를 바탕으로 한 환자 평가와 치료 계획 등이 자세하게 기술된다. 이 H&P는 환자를 담당하는 팀의 수련의인 레지던트가 작성하고 교수급인 attending physician이 사인을 마치면 공식적인 의무기록으로 남게 된다.
H&P는 기본적인 의무기록 중 하나인데다 서울대 병원에서 받은 어머니의 의무기록에 어머니가 췌장암 진단 확진 검사를 받기 위해 입원하셨을 때의 H&P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간호사의 인터뷰가 끝난 다음, 여기서도 당연히 담당의사 – 레지던트지만 서울삼성병원에서는 주치의라고 부른다 - 가 어머니에게 와서 인터뷰를 할 줄 알았다. 그런데, 입원한 다음, 담당의사가 나는 물론이고 어머니를 인터뷰를 하러 병실에 들어온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난 담당의사가 어떻게 어머니 상태에 대해 평가하고 계획을 세울 수 있을런지 상당히 궁금했다. 그런데, 이에 대한 답은 입원기간 동안 간호사들과 접하고 소통하면서 알아낼 수 있었다.
“어머니께서 불편한 점이 있으면 저희에게 말씀해 주세요. 그럼 저희가 의사 선생님께 말씀드릴께요.”
나와의 인터뷰가 끝날 즈음, 간호사는 내게 이렇게 부탁했다. 난 이 말을 어머니가 호소한 불편한 점을 간호사에게 말하면 간호사가 담당의사를 불러 줄 것이라고 이해를 했는데 이는 나의 큰 오해였다. 어머니의 통증이 잘 조절되지 않는다고, 어머니가 음식을 드실 때마다 토한다고 간호사에게 전달해도 의사는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시간이 좀 지나서 간호사가 나타나서는 다른 약을 주거나 이렇게 해 보라고 권하는 것이었다. 이로보아 환자와 담당의사간의 의사소통과정은 간호사를 중간매개로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즉, 내가 간호사에게 어머니의 불편한 점을 말하면 간호사는 이를 담당의사에게 전달한다. 그러면, 담당의사는 환자를 직접 보러 오는 대신, 간호사에게 치료방법에 대한 지시를 내리고 이를 간호사가 수행한다. 마치 의사는 높은 자리에 있어서 접근하기 힘든 사람이고, 간호사는 그 중간에서 의사의 일을 대신 해 주는 역할을 맡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기 때문에, 입원했을 때 담당의사를 대신해서 간호사가 나를 자세히 인터뷰했던 것으로 보인다.
간호사가 고유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은 단지 입원환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서울대 병원과 삼성서울병원 등을 외래 방문했을 때, 혈압 등vital을 측정하고triage를 하는 간호사 고유의 역할을 하는 간호사를 만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 간호사는 환자를 호명하고는 환자와 함께 진료실로 들어가서 의사의 지시에 따라 검사 또는 재진예약을 도와주는 일을 주로 하고 있었다. 물론, Kaiser와 같은 미국 병원에서는 간호사들이 대기실에서 환자를 호명하고 의사의 지시에 따라 검사와 재진예약에 대해 환자를 안내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고유 역할을 모두 수행하며 의사의 진료실에는 따라 들어가지 않는다.
간호사의 역할에 대해서 눈에 띄는 것이 몇 가지 더 있었다. 먼저, 간호사들은 대체적으로 할당된 일 이상을 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았다. 한 번은 어머니가 검사를 받기 위해 병실침대에서 수송침대로 옮겨야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어머니가 너무 기운이 없으셔서 스스로 움직여서 수송침대로 가실 수 없어서 간호사를 불렀다. 그런데, 들어온 한 간호사의 비직업적인 (unprofessional) 질문에 난 깜짝 놀랐다.
“제가 바빠서 그런데요, 정말 혼자 하실 수 없으세요?”
이런 간호사들의 태도에 대해 아내는 환자나 보호자가 무엇을 더 부탁할까봐 병실에 들어오면 빨리 나가려는 듯이 보인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아마도 담당하고 있는 환자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어떤 때는 기대하지도 않았던 일을 하기도 했다. 퇴원 전날이었다. 간호사는 필요한 서류가 무엇이냐고 물어보아서 입원기간 동안 작성된 의무기록이 필요하다고 했다. 난 의무기록을 떼는 곳을 알려 줄 알았는데 간호사는 다음날 의무기록 사본을 준비해 와서 깜짝 놀랐다. 환자를 수송침대로 옮길 시간은 없어도 환자의 의무기록을 떼어 줄 시간은 있었나 보다.
우리나라 간호사들의 이직율이 높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학교를 졸업한 지 얼마되지 않아 보이는 젊은 간호사들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는 나이 든 간호사들이 흔한 미국 병원과 매우 대조적이었다. 그런데, 아마도 간호사로서의 보람을 크게 느끼지 못한는 것도, 격무와 박봉과 더불어, 우리나라 간호사들의 높은 이직율의 한 원인이 될 것 같다. 학교에서 배운 간호사 고유의 역할보다는 일종의 비서와 같은 역할을 주로 한다면 간호사로서 보람을 얼마나 느낄 수 있을까?
미국 병원에서 간호사들은 관찰자 (observer)와 환자 옹호자 (patient advocator)라고도 불린다. 왜냐하면, 환자 가까이에서 환자의 크고 작은 변화들을 관찰해야 하고 환자의 건강과 치료를 대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사들도 관찰하지 못한 것을 간호사가 회진 중인 의사들에게 보고하여 진단과 치료를 돕는 모습을 미국 병원에서 많이 보아 왔다.
또, 의사들이 마련한 치료계획을 잘 받을 수 있도록 환자들의 편의를 고려하고 도와주는 간호사들도 많이 만났다. 우리나라 병원에서도 환자와 담당의사간의 의사소통의 매개자로서 뿐만 아니라, 간호사가 고유의 역할인 환자의 관찰자와 옹호자로서 환자 치료에 더 큰 도움을 줄 날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