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3> 섭씨, 와사등, 낭만적
심창구 서울대 명예교수 기자 news@yakup.co.kr 뉴스 뷰 페이지 검색 버튼
입력    수정 최종수정 2018-07-18 09:48
심창구 서울대 명예교수▲ 심창구 서울대 명예교수
지난 5월초 대엿새 동안 친구들과 캐나다 밴프에 가서 록키 산맥을 구경하고, 귀국 길에 미국 Davis에 들러 3주간 손녀들과 꿈 같은 시간을 보내고 귀국하였다. 그 동안 생각해 봤던 두 가지를 적어 본다.

1. 미국에서는 기온(氣溫)을 이야기할 때 우리처럼 섭씨 온도(攝氏, ˚C)로 말하지 않고 화씨 온도(華氏, ˚F)로 말한다. 섭씨 온도는 과학적인 표현을 할 때에만 사용한다. 또 미국은 우리에게는 미터법을 쓰라고 해 놓고는 자기들은 마일법을 쓰고 있다.

힘센 나라이니 우리가 안 따를 순 없지만 이런 것들이 미국에 간 우리나라 사람들을 어느 정도 귀찮게 하는 것이 사실이다. 미국에서 날씨 예보를 듣다가 어느 날 섭씨(攝氏)란 말이 어디서 유래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화씨는 독일 사람 Fahrenheit의 첫 발음에 경칭 씨(氏)를 붙인 것인 줄 금방 알겠다. 그런데 섭씨 온도는 영어로 Celcius라고 하는데 그럼 왜 세씨나 셀씨라고 하지 않고 섭씨(攝氏) 온도라고 부르게 되었을까 궁금해 진 것이다.

처음에는 섭씨가 일본어에서 유래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일본어에서 攝氏라고 라고 써 놓으면 아마 세츠씨로 읽지 섭씨라고는 절대로 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인터넷을 뒤져 보았더니 ‘섭씨 온도는 1742년 스웨덴의 천문학자 셀시우스가 처음으로 제안한 것으로, 중국 사람들이 셀시우스를 중국어로 음역(音譯)하여 ‘섭이수사(攝爾修斯)’라고 한 데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써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셀시우스씨를 섭씨라고 불러야 할 이유가 전혀 없지 않은가? 우리는 셀씨 온도라고 부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참고로 Fahrenheit의 중국 음역어는 ‘화륜해특 (華倫海特)’이라고 한다.  요컨대 섭씨와 화씨는 각각 Celcius씨와 Fahrenheit 씨의 첫 자를 비슷한 발음의 한자어로 표시한 것이었다. 

2. 옛날 을지로에 있던 경성약학전문학교(1930~1946) 설계도를 보면 와사실 (瓦斯室)이라고 써 있는 방이 나온다. 또 당시 교지(校紙)인 약전(葯箋) 제3호를 보면 독와사 방호법 보급회(毒瓦斯 防護法 普及會)가 쓴 ‘독와사(毒瓦斯) 연구’란 학술 논문이 나온다(개정판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100년사,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123-124).

나는 와사(瓦斯)가 무엇을 가르치는지 몰라 답답하였다. 그러다가 일본어 사전을 통해 瓦斯란 가스(gas)를 일본어로 음역(音譯)해 놓은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일본어에서는 瓦斯라고 써 놓고 가스라고 읽었던 것이다. 그래서 와사실은 가스실, 독와사는 독가스인 것이다. 

그러고 보니 김광균(金光均) 시인이 와사등(瓦斯燈)이란 제목의 시를 발표한 것이 생각난다. 

<와사등>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려 있다
내 호울로 어데로 가라는 슬픈 신호냐
(중략) 
내 어디를 어떻게 가라는 슬픈 신호기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리어 있다. 
 
이 시는 1939년 그가 펴낸 첫 시집 <와사등>에 실렸는데, 와사등이 가스등임을 알고 읽으면 한결 시의 의미가 명료해진다.  

3. 가스를 ‘와사(瓦斯)’로 쓰는 것은, 마치 영어의 ‘romanti’c을 ‘浪漫的(낭만적)’으로 쓰는 것만큼이나 어색한 일이다. 일본 사람들은 ‘浪漫的’을 ‘로만테끼’ 라고 읽지만, 우리는 ‘낭만적’으로 읽는다. ‘낭만적’하고 ‘romantic’하고 무슨 관련이 있는가? 

우리는 ‘섭씨’, ‘와사등’, ‘낭만적’이라고 쓰고 읽을 이유가 없다. 이보다는 각각을 ‘셀씨 온도)’, ‘가스등’, ‘로맨틱’ 등으로 적고 읽는 것이 훨씬 합리적이다.

얼마 전 대한약전(大韓藥典)에서는 일본어 풍의 ‘엑기스’와 ‘캅셀’이란 용어를 각각 ‘엑스(Ex.)’와 ‘캡슐’로 바꾸었다. 그러나 캡슐과 달리 엑스는 아직 대중의 사랑을 받지 못 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섭씨 온도를 ‘셀씨 온도’로 바꾸자고 우기지 않는다. 瓦斯가 오늘날 저절로 ‘가스’로 바뀌었듯, 섭씨도 바뀔 만하면 훗날 저절로 바뀔 것이기 때문이다.

만사(萬事), 억지로 하는 것이 능사(能事)가 아닌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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