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임 사또(유관준 劉寬埈)가 부임한지 일주일이 지났으나 부용을 불러들이지 않는다. 전임 사또들은 부임하자마자 기생 점고(點考·기생이름 열거)를 하며 그녀들을 총동원하여 성대하게 환영회를 여는 것이 관례로 되었으나 이번 사또는 사뭇 다르다.
신임 사또 유관준은 부임하자마자 육방 관속을 동원으로 불러 정사(政事)파악에만 열중이다. 그러길 일주일이 지난 어느 날이다. 그동안 설매의 성화에 밀려 부용은 매일 목욕재계하고 꽃단장으로 대기하고 있었다.
부임 일주일 만에 사또의 부름을 받았다. 부용은 자존심이 상했다. 그동안 네 사또들은 낮엔 목민관의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 헛기침을 해가며 거들먹거렸으나 밤엔 부용의 육체에 혼백을 빼앗겼다.
더욱이 사장(詞章·시가와 문장)에서는 체면 유지에 급급하였다. “부용아 너는 내 말을 귓등으로 들으면 후일에 큰 후회를 할 것이니라... 모든 것이 다 때가 있느니라! 이번에 온 사또는 젊은데다 한양에서 알아주는 사대부라고 부임하기 전에 소문이 파다했다.” 설매는 입에 게거품까지 물었다. 부용은 그 소문을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부용은 이번에야말로 자신의 사장학을 시험할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는데 사또가 보내온 가마는 평교자(平交子)로 종일품 이상이 타는 것으로 뜻밖의 예우다. 부용의 가마는 분 냄새가 진동하는 내밀한 방이 아닌 춘당지(春塘池)에 있는 연당(蓮堂)이었다. 해질 무렵의 연당은 그림같이 아름답다.
올해 따라 연꽃이 어느 해 보다 탐스럽고 아름답게 피었다. 꽃과 꽃 사이론 금붕어들이 쌍쌍이 노닐고 있어 정욕을 한껏 북돋아주는 분위기다. 더욱이 천하의 부용을 보고도 색욕을 느끼지 않는다면 설매의 말마따나 고자일 것이 분명하다. ‘맑은 노래 한가락을 바다와 하늘이 내려주고/ 붉은 빛 열두 난간을 달빛이 띄웠네./ 운모 병풍 머리 은 촛불 아래에서/ 미인의 걸음걸음마다 연꽃이 피어나네.’ 《부용당》이다.
부용은 비록 기생 신분이지만 자신감에 찬 당찬 꽃다운 여인이다. 지난 네 사또들에겐 부름을 받고 객고를 푸는 여자에 불과 했다면 이번 사또에겐 당당히 사대부 대(對) 기생신분을 뛰어 넘는 여류시인의 자격으로 사장(詞章)을 얘기하고 싶은 충동이 앞서 나갔다. 지금까지 배우고 익힌 사장을 총동원하여 신임 사또와 겨뤄보려는 태도다.
사내가 여자를 보면 우선 육체의 허기를 채우려 한다. 앞서 거쳐 간 목민관들이 하나같이 그러하였다. 부용이 신임 사또와 하룻밤을 자고나면 며칠은 끙끙 심하게 앓는다. 몸이 천근만근이 된데다 마음까지 상해 문밖출입을 사나흘 하지 않는다.
밑이 빠지는 것 같이 아프기도 하고 마음에도 없는 사내 물건과 노폐물(애액)이 자신의 소중한 물건에 들어와 인정사정없이 육두질을 해 대도 싫은 내색을 할 수 없는 처지가 한없이 섧고 세상의 사내들이 동물처럼 보이기까지 하였다.
그들이 배위에서 육두질을 하며 헐떡일 땐 맹수가 먹이를 뜯어 먹는 모습이 연상되기도 하여 소름이 끼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럴 때면 부용은 자신도 모르게 ‘아악’ 소리가 터져 나왔다. 사내 가슴을 밀쳐내며 소리를 질러 대면 기분이 좋아서 그러는지 알고 육두질을 사내는 더욱 거세게 몰아쳤다. 증오스럽기 까지 한 찰나다.
들어와 있는 물건을 쑥 빼고 벌떡 일어나고 싶어도 그 뒷감당이 무서워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을 참아야만 하였다. ‘하늘이 맑은 바람을 보내 시원한데다/ 좋은 밤이라 달그림자까지 둥글어라.’ 기러기는 길이 멀다 걱정하고/ 갈매기는 약속을 지키지 못할까 두려워하네./ 강가의 풀들은 의원 덕분에 알았고/ 산속의 꽃들은 그림 대신에 보았네./ 마음속의 일을 조용히 생각하느라고/ 붓을 멈추고서 구름 끝을 바라보네.‘ 《붓 멈추며》다. (시옮김 허경진)
남과 녀의 결합은 사랑이 매개다. 하지만 기생과 사대부(남자)와의 결합은 재화다. 또한 고을 사또에게 기생의 수청은 자의와는 상관없는 일종의 의무다. 기생의 운명이다. 부용은 기생신분이다. 사장에 아무리 뛰어나도 기생의 신분에서 한 발짝도 더 나아갈 수 없다. 그런데 지금 부용은 신임 사또와 사장을 겨뤄보려 벼르고 있다.
예방아전을 따라 부용은 연당에 도착하였다. 신임 사또는 연당 밑에 내려와 부용을 맞았다. “네가 부용이더냐?” “예 나으리! 소녀 부용이라 하옵니다. 불러주셔서 황공하옵니다.” “부용 네가 역시 소문대로 다르지 않구나? 내 좀 더 너를 일찍 봤어야 됐는데 정무 파악 하느라 좀 늦었느니라...” 신임 사또 유관준은 부용에게 깍듯한 예의를 갖추었다. 스승 김이양(金履陽)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부용이 김이양(金履陽)의 소실(小室)이 되었을 때를 벌써부터 염두에 두었던 터다.
제체례(除體禮·기생을 소개하는 예)를 마친 부용은 연당에 올라 유관준과 마주 앉았다.“ 역시 부용답구나... 오늘 저녁 나와 수창을 하면서 감로주(甘露酒)를 마시고 달구경을 하면 어떠하겠느냐?” 부용은 은근히 사장 대결을 희망했으나 헌헌장부 젊은 사또가 막상 제의하자 선 듯 말이 나오지 않았다. 열흘 가까이 기다리고 기다린 신임 사또 만남이 수창이나 하잔 말이 나오리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상황이다.
신임 사또가 부용을 부르면 술이 거나하게 취해 맹수가 먹이를 잡아먹듯 밤새 아래위를 오르내리며 육체의 허기를 채우는 것이 수청의 전례였다. 그런데 오늘 맞는 목민관은 고자인지 부용을 보고 감로주를 마시며 달구경을 하면서 수창을 하잔다.
부용이 기녀생활 4년 동안에 처음 맞는 사내와 밤을 새우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젊은 사내 본심이 언제 돌변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한껏 물오른 몸을 준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