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종 작가의 시 '방문객'의 한 구절이 크게 와닿은 적이 있다. 그는 우리가 인생에서 맞이하는 인연을 묘사하며 "한 사람의 인생이 온다"라는 표현을 썼다. 잠시 스쳐가는 인연일지라도 누구냐에 따라서 인생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안다.
'문화예술을 접한다는 것' 또한 예를 들어 좋아하는 전시회를 찾아 미적 자극을 얻고 기분전환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결론적으로 말해 문화예술, 특히 음악을 접한다는 것은 우리 인생 속에서 시공간을 뛰어넘는 무궁무진한 우주 혹은 세계관을 맞이하는 것과 같다.
현재 클래식의 연금술사로 불리며 세계적인 인지도를 누리고 있는 영국 출신 작곡가 막스 리히터. 바로크 시대의 거장 비발디의 <사계>를 현대적으로 재작곡한 <비발디 사계 리콤포즈드>는 듣는 이로 하여금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하이브리드적 시공간을 품은 우주를 경험케 한다. 18세기 초 이탈리아식 아날로그와 21세기 테크놀로지를 탑재한 현대인의 기술과 감성이 교차하며 절묘한 음악적 어울림을 자아낸다는 사실. 그뿐만이 아니다. 막스 리히터는 세계적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학적 세계관과 자신의 미니멀리즘 음악의 연결고리를 착상하였다. 놀랍게도 그는 하루키의 소설에서 텍스트를 추출하여 음악 속에 배치하는 시도를 통해 두 세계관을 연결하였다.
물론 이는 순수음악에 국한되지 않는다. 우연히 영화음악의 거장 한스 짐머가 작곡한 영화 <인터스텔라>의 음악이 흐르는 이어폰을 귀에 꽂고 화장실에 들어갔다 나온 지인 영화감독은 내게 "화장실에서 광활한 우주 속을 유영하고 나온 기분"이라고 했다. 한 옥타브 안에 존재하는 단 12개의 음으로 이루어진 음악이 선율, 화성을 기본으로 다양한 리듬과 무궁무진한 음색으로 변주되어 신비한 우주의 하모니를 주조한 것이다.
할리우드 영화음악을 대표하는 존 윌리엄스의 스타워즈 오프닝 테마는 단 몇 마디의 음악으로 관객들을 모험 가득한 머나먼 은하계로 빨아들인다. 아직까지도 전세계를 매료시키며 후속작을 쏟아내고 있는 거대한 스타워즈의 유니버스(Universe)에 있어서 조지 루카스 감독이 언급했듯, 음악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는 사실을 부인하긴 힘들것이다.
존엄한(?) 과거의 클래식도 예외가 아니다. 말러의 교향곡 2번 <부활>의 예를 들어 보자. 죽음이라는 엄숙한 주제를 말로 설명하자면 끝없는 논쟁거리로 끝날 수 있겠지만, 말러의 음악은 죽음이 드리운 장례식에서부터 삶에 대한 회상을 거쳐 결국 듣는 이로 하여금 마른 뼈가 살아날 것 같은 거대한 부활의 메시지를 던지며 온몸을 전율케 하는 피날레를 선사한다. 결국 다시 살기 위해 죽는다는 말러의 종교적 세계관 속의 성경적 핵심 '부활'은 음악을 통해 감동적으로 완성되며 기독교와 무관한 이들의 영혼까지 어루만지며 인생의 가치를 되돌아보게 한다. 대중의 흥을 돋우기도 하고 애절한 선율로 심연을 울리는 감동의 원천으로 여겨지기도 하는 음악. 모두 의미 있는 음악의 힘이다. 하지만 음악은 더 나아가 상상을 뛰어넘는 우주의 문으로 통하는 길임을 강조하는 바다.
당연한 사실이지만 이는 음악이란 장르에 국한되지 않는다. 화가 뵈클린의 미술작품 '죽음의 섬'은 작곡가 라흐마니노프로 하여금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며 교향시' 죽음의 섬'이라는 불멸의 작품을 쓰게 했으며 영화 <스타워즈>는 일론 머스크의 잠재된 모험심과 상상력을 자극하며 스페이스 X를 설립하는데 일조했다. 일단 먹고살 만해야 그 다음 예술이라는 일차원적인 생각을 뛰어넘어 인간은 일상 속의 문화예술을 통해 더 높은 가치와 정신을 함양하며 결과적으로 무한한 가치창출로 연결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영화 <반지의 제왕>으로 잘 알려진 영국의 명배우 이언 맥켈런은 예술이라는 화두를 던지며 "결국 예술은 우리의 내면에 무엇이 있는지 발견하고 영혼이 성장하는 것을 경험케 한다"고 역설한 바 있다. 예술은 늘 우리에게 속삭인다. "인생은 우리의 상상보다 더 크고 깊고 높다".
본 칼럼<아드리엘 김의 모멘텀 클래식>은 이번 회를 끝으로 여러분께 작별을 고합니다. 그 동안 클래시그널을 사랑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필자소개>
아드리엘 김은 오스트리아 빈 국립음대에서 지휘와 바이올린을 전공, 졸업(석사)했으며 도이치 방송 교향악단 부지휘자와 디토 오케스트라 수석지휘자를 역임한바 있다, 현재는 지휘자, 작곡가, 문화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