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오제 그리고 단오굿
초여름 뙤약볕이 내리쬐기 시작하면, 어릴 적 보았던 단옷날 풍경이 떠오른다. 천변을 따라 포장을 치고 난장이 튼다. 현수막을 단 애드벌룬이 멀리서도 단오장의 위치를 가늠케 한다. 구경꾼들을 따라 줄지어 장 구경을 하다보면, 그네 뛰는 곳과 씨름하는 곳도 만나고 노상에서 펼쳐지는 가면극이나 굿판도 만난다. 단옷날 밤에는 옥상에 평상을 펴놓고 앉아 불꽃놀이 구경을 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신나는 축제가 며칠씩 계속되었다.
설, 추석이 연중에 가장 큰 명절이지만 양기가 천지에 가득 찬 날이라 그 못지않은 가절이 단옷날이었다. - 최명희 <혼불> 중
음력 5월 5일은 단옷날이다. 단오는 설, 한식, 추석과 함께 우리나라 4대 명절의 하나다. 풍요의 계절에 맞이하는 추석이 중추가절(仲秋佳節)이라 불리듯, 만물이 왕성하게 생장하는 단오 역시 천중가절(天中佳節)이라 불렸다.
음력 날짜인데다 설이나 추석처럼 연휴가 주어지지 않아, 오늘날 단오는 잊은 채 지나치기 십상이다. 단옷날 행해지던 세시 풍속과 민속놀이도 현대인의 일상에서 거의 사라졌다. 하지만 단오제가 열리는 축제의 현장에서는 창포물에 머리를 감거나 단오떡을 맛보고, 그네뛰기·씨름·줄다리기와 같은 단옷날의 민속놀이를 구경하거나 함께해볼 수 있다. 음력 5월 5일을 전후로 열리는 강원 강릉과 경북 경산, 전남 영광의 단오제는 국가 지정 무형문화재로,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전통문화축제로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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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 1967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강릉 단오제는 유네스코의 무형문화유산 목록에도 등재되어 있다. 동해안의 마을 축제 중 가장 큰 행사로, 예로부터 여러 계층의 사람들을 두루 아우르며 민관이 조화롭게 합심해 축제를 이어왔다.
강릉 단오제는 단옷날을 한 달 앞둔 음력 4월 초닷새에 신에게 올릴 술을 빚는 것으로 시작한다. 열흘 후 술이 알맞게 익으면, 대관령 산신당에서 제사를 올린다. 이때 제의의 대상인 대관령 산신은 김유신 장군이다. 그 다음에는 신이 내린 신성한 나무[神木]를 모신 국사성황 행차가 국사성황당·구산성황당·학산성황당 등을 차례로 들러 서낭굿을 벌이며 강릉시 홍제동에 있는 국사여성황당으로 향한다. 영신제를 지낸 후, 남대천변에 마련된 제단으로 자리를 옮기면 본격적인 축제가 시작된다.
성황신의 행차가 이어지는 여정에는, 국사성황으로 받들어지는 범일국사와 여성황신 정씨 처녀에 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학산 마을의 처녀가 해가 떠 있는 우물물을 마시고 아이를 낳았다는 이야기는 범일국사의 탄생 설화다. 역사 속 범일국사는 강릉 학산마을에서 태어나 신라 말 구산선문 가운데 하나인 사굴산문을 연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여러 왕이 국사로 청하였으나 고사하고 강릉에 남아 후학 양성에 매진했다고 한다. 살아서는 불교사에 한 획을 그은 고승이 죽어서는 단오굿의 주신 자리를 꿰찬 셈이다. 사후에 국사성황이 된 범일국사는 정씨 처녀의 아버지 꿈에 나타나 딸과 혼인하고 싶다는 뜻을 전한다. 처녀의 아버지는 거절하지만, 호랑이에게 잡혀가고 만 정씨 처녀는 여성황신이 되어 지금껏 국사성황 곁을 지키고 있다.
단오제에서는 유교의 제례와 단오굿뿐 아니라 강릉 인근에서 전해오는 다채로운 문화유산들을 연행한다. 우리나라 전통극 가운데 유일하게 무언극으로 행해지는 관노가면극, 강문동의 서낭굿인 강문진또배기제, 강릉 학산마을에서 전승하는 김매기소리인 학산 오독떼기 등이 그것이다.
‘한장군놀이’에서 이름이 바뀐 경산자인단오제에는, 여장을 하고 누이동생과 함께 화관을 쓴 채 춤을 추며 왜적을 물리쳤다는 한장군의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한장군에게 제사를 지내는 한장군대제, 왜적을 물리치는 장면을 재현한 여원무女圓舞, 팔광대탈춤과 단오굿 등이 이어진다. 한장군대제를 지내러 가는 가장 행렬과 여원무에서 등장하는 화관이 매우 이색적이다.
한편, 법성포는 조기 파시(波市)가 크게 서던 곳이다. 파시는 생선이 제철일 때 열리는 어시장이다. 난장이 열리면서 사람들이 모여들고, 바닷사람들의 안전과 풍어를 기원하는 굿판이 벌어지고, 부녀자들의 뱃놀이와 예인들의 경연대회가 더해지며 규모와 내력을 갖춘 축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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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4일 신주 빚기로 시작된 강릉단오제는, 6월 20일 영신제부터 25일 송신제까지 풍성한 볼거리와 즐길 거리를 준비하고 있다. 강릉관노가면극은 6월 18일부터, 단오굿은 21일부터 축제가 끝날 때까지 매일 볼 수 있다.
6월 8일 신주 빚기 행사를 마친 경산자인단오제는 단옷날인 6월 22일부터 24일까지 이어진다. 22일 경상북도무형문화재 종목들과 함께 단오 행사들이 열리고, 토요일인 24일에는 여원무, 팔광대, 호장행렬 등 일정이 한 번 더 예정되어 있다.
단오 당일 산신제와 학술대회로 문을 여는 법성포단오제는 용왕제, 당산제와 수륙대제, 선유놀이, 숲쟁이 전국국악경연대회 등을 연이어 개최하며 25일 폐막식까지 40여 개 프로그램을 빼곡하게 채웠다.
6월 30일부터는 국립남도국악원에서 ‘단오굿’을 주제로 한 굿음악축제가 열린다. 단옷날인 6월 22일까지 참가 신청을 할 수 있고, 참가자들에게는 2박 3일간 숙식을 제공한다. 6월 30일에는 법성포단오굿을, 7월 1일에는 강릉단오굿을 야외공연장인 달빛마당에서 선보일 예정이다. 강릉·자인·법성포 세 지역 단오굿의 음악을 다루는 학술회의는 7월 1일 오전에 열린다.
<필자소개>김보람 씨는 동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와 영상대학원 문화콘텐츠학과를 졸업했으며, 국립국악원에서 소식지 국악누리 제작을 담당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