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블로 카잘스 이후 ‘첼로의 천재’라고 불리는 로스트로포비치. 일명 ‘슬라바’는 20세기 가장 뛰어난 첼리스트로 일컬어지며 당대 한계에 부딪혔던 첼로주법을 발전시킨 장본인이다.
그는 구소련 태생으로 1927년에 태어났다.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공부를 하였고, 이후 서유럽을 드나들며 왕성한 연주 활동을 펼쳤다. 그런 그에게 인생의 전환점이라고도 볼 수 있는 큰 사건이 벌어진 것은 1970년대. 작가 알렉산드로 솔제니친과의 인연 때문이었다. 그는 솔제니친을 자신의 집에서 보호해주었는데 이 사건으로 외국 공연이 제한되었고 소련의 주요 도시에서 연주 기회가 줄어들었다. 결국 1974년, 로스트로포비치는 가족과 함께 소련을 떠나 미국으로 망명을 결심했고 1978년 소런 시민권을 박탈당했다(1990년 다시 재획득하기는 했다). 한편, 이 사건이 그에게 다른 의미에서는 음악가로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는데 바로 미국 내셔널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으로 취임한 것이다.
필자는 뉴욕 필하모닉 재직 당시 이 다사다난한 인생의 주인공과 운 좋게 함께 일할 기회가 몇 번 있었다. 덕분에 그의 귀여운 모습을 목격할 기획도 있었는데 그가 10시에 리허설 스케줄이 잡힌 날이었다. 그런데 평소와는 달리 9시 55분이 되어도 그가 공연장에 나타나지 않는 것이었다. 당시 매니저였던 필자는 출연자 입구로 내려가 초조한 마음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데 잠시 후 조그마한 키의 그가 헐레벌떡 뛰어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에게 말을 걸려던 순간, 그가 “저는 오늘 지휘를 하러 온 로스트로포비치라고 합니다! 시계가 고장 나 늦었어요! 죄송합니다!”라고 외치는 것이었다.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웃음이 나오는 걸 꾹 참고 그를 무대까지 안내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날의 특별한 경험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리허설을 무사히 마친 후 그가 나를 따로 찾아와 몇 번이나 고맙다고 인사를 따로 전했던 것이다. 민망할 정도의 인사가 끝난 뒤 할 말을 찾던 그 때 그의 바흐 무반주 모음곡 앨범이 생각났다. 어린 시절 주말 아침마다 나를 깨워준 음악이 바로 그의 무반주 첼로 소나타였던 것이다. 그의 과분한 감사 인사에 용기를 얻어 “주말 아침마다 엄마가 틀어주신 당신의 무반주 소나타를 들으며 일어났어요. 덕분에 주말이 몹시 행복했죠. 당신의 연주를 도울 수 있다는 것만으로 전 너무 자랑스러워요.” 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내 눈을 바라보며 “내 연주를 그렇게 들어줘서 고마워요. 음악은 아름다운 것이죠. 음악은 어떤 것이라도 바꿀 수 있는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어요.”라고 말하고 나를 힘껏 안아주었다. 그 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위엄 있는 지휘자 대신 포근한 할아버지의 따뜻한 품이 생각난다.
이 순간을 함께 했던 또 한 사람. 뉴욕 필하모닉 前 퍼스널 매니저 칼 쉬블러는 이후 나에게 또 다른 그의 일화를 들려주었다. 미국 무대에 선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 그가 뉴욕 필하모닉과 연주할 때는 항상 첼로 수석의 악기를 빌려 연주했고 악장 옆에 KGB 요원이 앉아있었다고 한다. 왜인지 물으니 당시 구소련에서 로스트로포비치가 서방으로 도주할 것을 우려해 악기 외국반출을 금지시켰고 연주 중 도주를 방지하기 위해 KGB 요원을 배치했다는 것이었다. 내가 보았던 따뜻한 할아버지 로스트로포비치의 모습과는 상반된 그의 일화를 들으며 그가 음악가로서나 인간으로서 얼마나 힘든 길을 걸어 여기까지 왔을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로스트로포비치가 음악가로서도, 한 인간으로서도 존경받고 존중받는 점은 구소련 체제 속에서 어려움을 헤쳐나온 것 뿐만 아니라 젊은 음악가들을 끊임없이 발굴해냈다는 것이다.
피아니스트 마르타 아르헤르치, 에브기니 키신, 바이올리니스트 막심 벤게로프<위 사진> 등 이미 이름만으로 모두가 인정하는 세계 최정상의 연주자들. 그리고 한국의 첼리스트 장한나까지 모두 로스트로포비치의 제자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제자 사랑은 무대에서도 느낄 수 있는데, 그는 연주를 시작할 때 협연자를 앞세우고 지휘자가 뒤따라가는 일반적인 무대 등장 대신 아르헤르치, 벤게로프와 손을 꼭 잡고 함께 무대로 걸어 들어갔다. 그 모습은 아미 자식의 손을 잡은 아버지의 모습 같다.
사실 백스테이지에서의 그는 까다로운 아티스트이다. 음식에 대한 취향도 까다롭고 전석 매진인 자신의 공연 초대권을 공연 시작 5분 전에 요청하고, 정열적인 지휘 탓에 공연 도중 지휘봉을 부러뜨리기도 한다. 그의 무대를 준비하는 동안은 단 1분도 긴장의 끈을 놓칠 수가 없다. 그럼에도 그가 만들어낸 음악을 뒤에서 듣고 있자면 그 요구들은 별 것 아닌 일로 금방 잊히고 만다. 세상이 인정하는 거장인 그가 아직도 음악 앞에서 순수하게 감사하며 겸손해하는 모습을 지켜볼 때면 다시 한 번 진정한 음악의 의미를 떠올리며 감동하게 되는 것이다.
필자가 보고 겪고 들은 이야기 속에서 로스트로포비치의 모습은 전부 다른 사람처럼 느껴진다. 길을 안내해주었다는 사실만으로 넘치는 감사함을 표현한 따뜻한 할아버지. 친구를 위해 체제의 감시까지 묵묵히 버텨낸 자유의 수호자. 한계에 부딪힌 첼로주법을 발전시킨 발명가. 젊은 음악가들을 끊임없이 발굴해내는 선구자까지. 과연 그의 인생을 표현할 수 있는 한 단어가 있을까. 필자는 감히 그에게 ‘개척자’라는 별명을 붙여주고 싶다. 음악을 통해 소련을 넘어 미국에서 자유를 표현하고 제자들의 손을 이끌어 국제무대의 길을 열어주는 그의 모습은 마치 음악의 새로운 대륙을 발견해내는 개척자의 모습 같다.
로스트로포비치를 통해 들여다 본 음악가의 삶에는 아름다운 선율처럼 평화로운 시간들만 존재하지 않았고, 우리는 그의 삶에서 아주 작은 면면을 훑어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속에서 삶을 계속해 나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명징하게 드러난다. 포기하지 않는 용기. 그리고 인내. 멈추지 않는 도전정신.
당대 최고의 음악가와 잠시나마 함께 했던 순간을 떠올리면 내 아이들도 저렇게 강인한 사람으로 자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부모의 욕심이지만 우리 아이들도 ‘개척자’가 될 수 있는 용기 더 나아가 그 용기를 지탱할 수 있는 끈기가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바란다.
<필자소개>
박선민씨는 한국예술종합학교(예술경영)와 홍콩과학기술대학(MBA)을 졸업한 후 미국 뉴욕필하모닉 기획팀 및 싱가포르 IMG Artists에서 근무한 바 있다. 현재는 선아트 매니지먼트 대표를 맡고 있으며 한양대학교에서 예술경영을 강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