툇돌에서 귀뚜라미 노래 소리가 요란하다. 한두 마리 노래 소리가 아니다. 합창이다. 아들, 딸, 손자, 손녀 등 대가족이 다 모여 합창을 하는 노랫소리 같다. 달이 휘영청 밝은 밤엔 더욱 노랫소리가 요란하다.
덕봉이 며칠 전부터 잠을 설치고 있다. “나 하직하고 내려가고 싶소...” 말이 가슴을 송곳으로 후벼 파는 것 같아서다. 이제 겨우 서울 생활에 적응하여 재미를 붙이고 있는데 고향으로 내려가잔 말은 마른하늘에서 벼락을 맞는 심정이다.
고향에 있을 땐 손수 농사를 짓고 살림살이 전반을 건사해야 했지만 서울 생활은 시골살이에 비해 여자의 삶이 한결 수월해졌다. 이제 남은여생은 결코 넉넉한 생활은 아니지만 그렇게 서울살이를 하고 싶은데 뜬금없이 고향으로 내려가고 싶다는 미암의 말에 덕봉은 배신감마저 들었다. 더욱이 한마디 상의도 없이 불쑥 내던지듯 하는 말에 분노감이 치솟았다. 너무 자기 위주여서다.
덕봉이 밤잠을 설침은 벌써 보름째다. 툇돌 귀뚜라미 가족의 합창은 깊어가는 가을과 같이 가고 있었다. 귀뚜라미 가족의 합창은 요란하지만 마음이 울적할 때는 덕봉에겐 위로가 되었다.
덕봉은 마음이 몹시 상할 땐 눈물 없는 울음을 엉엉 울었다. 고향에 있을 땐 아침저녁으로 남편의 입신양명을 위해 정화수 기도를 드릴 때 울었고 서울에선 귀뚜라미 노래에 맞추었다. 덕봉은 가을엔 여전히 소녀처럼 마음이 약해졌다.
덕봉의 외출이 부쩍 늘었다. 아침에 나가면 해가 설핏해져야 들어왔다. 어떤 땐 미암의 퇴근길과 같이 귀가할 때도 있다. 만약 고향으로 내려가게 되면 다신 한양에 올수 없을 것 같아 하나라도 더 보려는 심사다.
서촌(西村)은 물론이고 피맛골과 중촌(中村)까지 골목골목을 덕봉은 직접 발로 살피고 있다. 조선의 상류계급인 북촌을 비롯한 서촌, 그리고 전문 직종들이 모여 살고 있는 중촌까지 샅샅이 살피고 시골로 내려가려는 속내다.
미암의 결심을 꺾을 수 없어서다. 잠자리에서 승낙을 얻어내지 못한 미암은 며칠 내로 제2의 화촉동방 잠자리를 만들어 또 그 말을 꺼낼 것이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지금 시간을 끌고 있을 뿐 한번 내뱉은 말을 거두어들인 적이 미암은 아직까진 없다. 덕봉도 이미 속으론 동의를 해놓고 ‘그렇게 합시다.’ 대답만 하지 않고 있는 상태다.
즉석에서 거부의사를 밝히지 않고 있으면 미암은 동의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지금까지 사반세기를 살아온 과정에서 어떤 문제에 있어 덕봉의 동의가 필요해 물으면 그렇게 대답을 해 주었기 때문이다. 묵묵부답으로 2~3주까지 아무 말이 없으면 그것은 묵시적 동의로 미암은 처리하였다.
고향으로 내려가잔 말도 그런 분위기다. 미암은 육조에 있는 친구들에게 고향으로 간다는 귀띔을 이미 한 상태다. 밤마다 이별주다. 20년을 유배생활을 하다 한양에 입성한 미암은 권력의 무상함을 절감한다. 사대부보다 향반시절이 그립다.
양반이 되어 한양에 올라와서 시골의 정든 사람들로부터 질투를 받는 것이 미암은 즐겁지 않다. 한양 북촌에서 여생을 보낼 수 있어도 자식들의 삶을 책임질 수 없어 고향으로 내려 갈 마음이 굳어졌다. 소위 출세보다 행복을 찾으려는 마음이다.
미암은 오늘도 밤이 이슥해서 귀가하였다. 덕봉의 이불속으로 들어오는데 술 향이 맞바람처럼 풍겼다. 맞바람 속엔 향긋한 여인의 살내음도 아침안개처럼 피어났다. “아이~~ 술 냄새! 또 마셨어요?” 덕봉은 단말마처럼 외마디 던지고 획 돌아누웠다. 막 잠이 들려는 찰나였다. “당신은 웬 매일 술타령이에요? 한 푼이라도 더 모아 시골로 내려가야 되지 않아요?” 미암은 속으로 그러면 그렇지 라며 덕봉을 등 뒤에서 쓸어안는다. 미암의 손이 거침없이 덕봉의 속곳을 쓸어내린다. 따뜻한 미암의 손길이 둔부를 거쳐 덕봉의 사타구니로 들어간다.
덕봉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미암이 덕봉을 안으며 돌아 누인다. 미암의 술 향이 덕봉의 코에 재스민 향처럼 스며들었다. 죽매와 옥매의 노래와 춤에 흥겨웠던 마음이 아직 식지 않은 상태다. “언제 내려갈 거예요?” 다정한 목소리다.
남녀칠세부동석·삼종지덕·현모양처의 전형적인 음성이다. “이제 가을로 접어들었으니 겨울이 되기 전에 내려가야지...” 미암은 어느새 덕봉과 얼굴을 맞대는 위치가 되었다.
미동도 하지 않던 덕봉도 수동에서 능동으로 자세가 바뀌었다. 어차피 내어 줄 몸 스스로 열어줄 속내다. 성리학의 나라 조선사회에서 여자의 위치는 능동적 자세가 될 공간이 아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능동적 자세가 가능한 공간은 구중궁궐 같은 내실의 부부관계에서나 봄직한 신비스런 장면이다. 어차피 사내들은 여자의 몸에서 쾌락을 즐기는데 부부관계에서까지 관행처럼 수동적이면 너무나 슬픈 존재란 생각이 덕봉의 뇌리를 천둥같이 내려쳤다. “고향으로 내려가기 전에 정도전의 새로 건설한 한양의 아름다움을 기리기 위한 시조 《진신도팔경시》(進新都八景詩) 중에 두 번째 연 (도성궁원·都城宮苑)인 ‘성은 높아 천 길의 철옹성이고 / 구름에 둘러싸인 궁궐 오색 찬연해 / 연년이 어원에는 봄 경치가 좋은데 / 해마다 도성 사람 즐겁게 노네.’ 와 칠연《남도행인》(南渡行人)인 ‘남쪽 나루의 물결은 도도히 흐르고 / 나그네들 사방에서 줄지어오네. / 젊은이는 짐 지고 늙은이는 쉬고 / 앞뒤로 화답하여 송덕가 부르네.’ 가 가장 마음에 들어요. 팔경시를 다 볼 수는 없어도 두 연의 장관을 보고 내려갑시다.” 덕봉의 명령조 목소리다.
미암의 방사는 오늘따라 싱겁게 끝났다. 덕봉은 이제 감흥이 오르려는데 헛기침을 하며 불두덩에서 내려갔다. 덕봉의 명령조 목소리에 미암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였다. 지금까진 들어본 적이 없는 당당하고 거역할 수 없는 위엄까지 있어서다. 사내는 오늘따라 방사가 신통치 않아 밸이 꼴려서 심통을 부리나 생각하는 눈치다. 그들은 새벽닭이 아침을 알리는 천둥 같은 울음소리에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