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이슥해서 미암이 귀가하였다. 얼근하게 취한 상태다. 기분이 좋아보였다. “허허 부인이 오늘따라 더 고와 보이오... 오늘 내 전하께 고향으로 돌아가리라 말씀을 올렸소! 그러나 윤허(允許)를 얻어 내지 못했소이다.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 후학을 가르치며 부인과 조용히 살고 싶소! 부인 뜻은 어떠하오?” 미암의 입에서 술 향이 덕봉의 얼굴을 덮었다.
미암이 문 여는 소리에 덕봉이 행복한 꿈에서 깨어났다. 덕봉의 얼굴에 미소가 그려져 있고 입엔 침까지 흘린 자국이 선명하다. 속곳이 반쯤은 내려졌다. 무슨 일이 벌어졌던 흔적이다. “꿈을 꾸었소?” 미암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아-예!” 덕봉은 반쯤 내려간 속곳을 얼른 추슬렀다. “오늘도 임금이 왔소이까?”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아세요?” “당신 표정을 보면 알 수 있지...” 그랬다. 덕봉의 표정은 꿈에 임금이 현몽하면 얼굴이 복사꽃이 피듯 활짝 피었다.
공적 공간인 사회에 나가지 못하는 여자로서 비록 꿈이지만 조선 팔도를 호령하는 임금을 만나면 하고 싶은 얘기를 속 시원하게 말 할 수 있어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여서 온몸이 잘 익은 홍시처럼 상기 되었다. 속곳은 열이 올라 자신도 모르게 내렸다.
어떤 땐 속곳을 몽땅 벗어던져 알몸이 된 적도 있었다. 전후 사정을 모르는 사람은 덕봉의 모습을 보면 부부관계를 했거나 하려는 모습으로 착각할 정도다. 지금이 바로 그와 유사한 모습이다. “이리 오구려...” 미암이 덕봉을 덥석 안는다. 손길이 서슴없다.
덕봉도 꿈에서 임금을 위한 옥매와 죽매의 춤과 노래에 흥이 한껏 부추겨져 있을 때다. 미암의 몸놀림이 평소와 사뭇 다르다. 첫날 밤 화촉동방에서 신선하고 풋풋한 사랑의 향기가 온몸에서 아침안개처럼 피어났다. 덕봉이 그렇게 느껴졌다.
방금 꿈에서 만났던 임금이 미암으로 진화되었다. 여름밤의 방안은 용광로 바로 그것이다. 미암은 청루에 들려 친구들과 거나하게 취해 돌아올 때부터 덕봉을 염두에 두었다. 그런데 마침 덕봉이 꿈속에서 임금 앞에서 죽매는 노래하고 옥매는 춤을 춰 흥을 절정으로 돋우어 주고 있는 찰나였다.
꿈과 현실이 절묘하게 점목 된 황홀한 상태다. ‘천기가 비록 넓다고 하나 / 깊은 규방에선 그 참 모습 보지 못하네. / 오늘 아침 반쯤 취하고 보니 / 사해는 넓어 가이 없도다.’ 《취하여 읊다》다. 부부는 참으로 오랜만의 달콤한 부부관계다. “당신 지금은 이십대 청춘 같아요!” 덕봉이 미암의 가슴을 밀어내며 속삭인다. 만족한 표정이다. 창문으론 휘영청 보름달 달빛이 들어와 벌거숭이 부부의 아름다운 모습을 신비스럽게 비추고 있다. “나 하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가고 싶소. 당신 생각은 어떻소?” 미암이 덕봉의 배위에서 내려오며 불쑥 말을 던진다.
덕봉의 불두덩은 아직 얼얼한 상태다. 미암이 오뉴월 칡소 모양 밀어붙여 화촉동방 이후 처음으로 입에서 단내가 나고 불두덩에 멍이 들도록 뜨거운 사랑을 나눈 후유증이다. 덕봉은 몸과 마음이 하늘을 날 듯 기분이 좋았는데 미암의 갑작스런 물음에 기쁨이 백지장으로 변해 버렸다.
사실 덕봉은 시골생활이 더는 싫다. 16살에 결혼하여 입신양명을 위해 남편 미암은 향반주제에 선비인 냥 가사는 뒷전으로 덕봉이 도맡았다. 꽃보다 아름다운 나이에 신혼 재미로 밤낮이 없을 시절에 가기(家妓)인 죽매와 옥매를 데리고 여자 가장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불혹을 넘긴 나이에 한양에 와 겨우 춘몽(春夢·희망)의 화려함을 현실로 보려하는데 고향으로 내려가잔 말은 생지옥으로 가잔 말이나 다름이 없다. “왜 대답이 없소?” 미암이 초점 잃은 시선으로 천장을 쳐다보고 있는 덕봉에게 다그쳐 물었다.
사랑의 뜨거운 감정이 식기 전에 확답을 들으려는 눈치다. 덕봉은 신혼의 화촉동방 이후 제2의 화촉동방의 즐거움을 느꼈는데 열락의 기쁨이 한순간에 날아갔다. 고향으로 가자는 동의를 받으려고 계획된 사랑놀이로 생각되어지자 씁쓸한 기분이 온몸을 감쌌다. “고향으로 가시려면 당신 혼자 내려가세요! 저는 식구들과 이곳에서 살렵니다...” 시선은 천정에 둔 채다.
예전 같으면 방사(房事)가 끝나면 잽싸게 일어나 나가 뒷물을 하고 들어와 미암의 가슴을 파고 들 찰나인데 목석이 된 상태다. 전례 없이 싸늘한 분위기다. 미암은 오래전부터 귀향을 생각했었던 것을 이제야 속내를 털어놨으나 덕봉은 처음 듣는 청천벽력이다. 더욱이 시골살이에서 꿈에서지만 임금을 봤는데 이젠 비록 꿈이지만 같은 한양에서 임금을 볼 수 있어 더없이 행복한 때다.
그런데 미암이 귀향하자는 것이다. “당신이 안내려 간다면 나도 가지 않겠소! 나 혼자 어떻게 간다는 말이오? 이제 유배생활은 더 이상을 싫소... 내 인생이 얼마나 남았다고 당신과 헤어져 살겠소... 알았소. 이제 당신 생각이 그러하니 다신 귀향 얘기는 내 입밖에도 꺼내지 않겠소!” 미암은 대단히 실망한 표정이다.
자신이 얘기하면 ‘그렇게 합시다.’하고 선뜻 동의를 얻어내리라 생각했었던 분위기다. 미암은 덕봉의 천정에 가 있는 시선으로 눈을 돌리며 긴 한숨을 토해내면서 탁자에 놓인 술병에서 술을 잔 가득 따라 단숨에 넘겼다.
덕봉은 가슴이 쓰려왔다. 지금까지 남편의 말에 토를 달거나 반대를 한 적이 없었는데 지금 분명한 거부 표시를 해 힘이 빠지는 표정을 보자 금방 후회가 돼서다. 그렇다고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자고 말할 수도 없는 분위기다.
남편은 이미 마음이 상할 때로 상해 있을 것이고 자신도 한번 한 말을 금방 뒤집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정말로 시골은 싫다. 이제 북촌을 비롯한 한양의 아름다운 환경에 익숙해지면서 재미를 붙여가는 생활에 행복감이 하루가 다르게 충만해져 갔다. 그러나 등을 보이고 돌아누운 남편이 마음에 계속 신경 쓰였다. 부부는 일심동체란 말이 뇌리를 계속 때리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