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군대 가기 싫었던 청년 이야기
백승만교수의 '전쟁과 약'이야기
백승만 기자 news@yakup.co.kr 뉴스 뷰 페이지 검색 버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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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 가기 싫었던 청년 이야기

군대 가고 싶어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안 갈 수 있으면 안 가는 게 낫다라고 생각하는 게 일반적이다하물며 자국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이역만리 타국이라면그것도 단순한 복무가 아니라 치열한 교전의 현장이라면 더더욱 가기 꺼려지게 마련이다. 1951년 3월 26미국의 22세 청년 E. J. H.도 그랬다.

이 청년은 한국전쟁에 참가하라는 징집통지서를 받았다하지만 이 청년은 순순히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여러모로 반항을 하기 쉬운 나이지만 당시 이 청년이 택했던 방식은 좀 더 극단적이었다바로 자살입대하기 싫은 마음이야 십분 이해하지만 그래도 자살은 좀 심했다그래도 어쨌든 이 청년은 한반도에서의 죽음 대신 자택에서의 죽음을 택했다그는 디콘(d-con)’이라는 약을 먹고 죽기로 했다당시 갓 나와서 대대적으로 팔리던 쥐약이었다.

그런데 정작 다음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는 잠에서 깨어났다죽는 것도 마음대로 안 돼서 화가 났던지그는 다음날 다시 그 쥐약을 복용했다이번엔 마쉬멜로우처럼 약간 달콤한 맛도 느껴졌다하지만 어쨌든 다음날 아침 그는 또다시 잠에서 깨어났다그렇게 엿새 밤에 걸쳐 대략 공기밥 반 공기에 해당하는 113그램의 쥐약을 먹고도 그는 죽지 못했다그리고 이것도 운명이라며 그는 체념하고 입대했다. 4월 4일 이 신병을 상담하던 의사가 이러한 사례를 듣고 이듬해인 1952년 이 결과를 논문으로 발표하면서 해당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도대체 디콘은 어떤 쥐약일까성분명 와파린(warfarin)이라는 이 물질은 1940년대 중반 위스콘신 대학의 약화학자 칼 링크(Karl P. Link)라는 사람이 만든 혈액응고억제제다개발의 계기가 된 물질은 디쿠마롤이라는 쿠마린 계열의 식물독이었다. 1930년대 미국에 흉년이 겹치자 북부지방에선 소 사료를 구하는 것조차 어려워졌다당시 농부들은 한해 전에 남겨뒀던 사료들도 마지못해 먹이곤 했는데 이런 사료를 먹었던 소들은 어김 없이 출혈로 죽어 나가곤 했다이 지역에서 근무하던 링크 교수는 상한 사료에서 원인이 되는 물질을 추출하고 순수하게 화학적으로 합성해 결과를 확인하였다이때가 1939독일이 폴란드를 병합하고 영국이 전쟁을 선포하며 제2차 세계대전으로 확전하던 바로 그 시기다대서양 건너 미국의 링크 교수도 전쟁과 관련한 연구를 진행했다그는 디쿠마롤을 기반으로 후속 물질을 연구했는데 이때 연구비를 댄 곳이 위스콘신 동문 연구기금(Wisconsin Alumni Research Foundation, WARF)이다와파린이라는 이름도 여기에서 유래하였다.

링크가 디쿠마롤을 기반으로 만들려 했던 물질이 부상병들에게 유용하게 쓰일 지혈제일지적군을 암살하는 데 쓰일 출혈제일지는 남아있는 자료가 별로 없다하지만 그가 만든 와파린은 혈액응고억제제였다혹시 모른다전장에서 살상용으로 쓰일지그런데 어느덧 전쟁이 끝나버렸다더 이상 용도가 남아 있지 않을 것 같던 이 물질와파린을 가지고 링크가 찾아 낸 시장이 바로 쥐약이다생각해 보면 쥐 때문에 우리 인류가 얼마나 고역을 겪었던가보건 위생부터 시작해 페스트와 같은 전염병까지쥐는 우리 인류에게 그닥 반가운 동물이 아니었다그래서 링크 교수는 이 물질을 쥐약으로 개발했고 쥐는 와파린에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작은 상처에도 피를 줄줄 흘리며 죽어갔다그렇게 민간에서 널리 사용되다 어느덧 군대 가기 싫은 청년의 손에 들어간 것이다.

쥐는 잘 죽는데 사람은 왜 안 죽는 걸까이후 밝혀진 바에 따르면 사람은 체내에서 지혈 효과를 담당하는 물질이 많이 있다가령 비타민같은 물질이 대표적인 혈액응고제다따라서 약간의 와파린이 들어와도 하지만 상쇄해낼 수 있다소동물인 쥐는 혈액응고체제가 사람만큼 강력하지 못 하다그래서 죽는다앞서 언급한 논문에 따르면 자살을 시도했던 청년에게도 부작용은 있었다코피가 났다와파린의 효과와 정확하게 부합한다.

혈액 응고 억제 효과가 탁월하고 코피 정도의 부작용이 있다면그리고 죽지 않는다면 나름대로 활용 가치가 높은 것 아닐까이런 사례가 보고되면서 수술 시의 혈액 응고를 막는다거나 혈전 생성을 억제하기 위해 와파린이 사용되기 시작했다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수술에 사용될 정도였으니 쥐약으로 쓰던 시절에 비하면 괄목상대라고 할 수 있다전쟁을 통해 약이 개발된내가 아는 한 가장 극단적인 사례다.

 

<필자소개>
백승만 교수는 서울대학교 제약학과 졸업후  동 대학원에서 생리활성 천연물의 화학적 합성에 관한 연구로 약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텍사스 사우스웨스턴 의과대학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11년부터 경상국립대학교 약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의약화학을 강의·연구하고 있다.  현재 파킨슨병과 같은 퇴행성 뇌질환 치료제를 연구 개발하고 있으며 약의 역사도 함께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전쟁과 약, 기나긴 악연의 역사’ ‘분자 조각자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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