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대륙봉쇄령과 아스피린
버드나무 껍질에 해열 효과가 있다는 것은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던 이야기였다. 하지만 오래전 이야기는 이야기일 뿐 진짜 효과 있는지는 검증을 해야 한다. 그리고 그냥 넘어가면 될 일들을 굳이 검증하는 까칠한 사람들도 있는데, 이런 까다로운 사람들 덕분에 과학이 발전하곤 한다. 에드워드 스톤 (Edward Stone)도 그랬다.
1763년 영국의 성직자 스톤은 사람들을 나누어 한쪽 그룹엔 버드나무 껍질 추출액을 테스트하고 다른 그룹엔 다른 물질을 투여하였다. 이후 그는 버드나무 껍질 추출액에 해열 효과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그 결과를 정리해 학회에 보고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이 혁신적인 결과를 받아본 학회의 반응은 놀랍게도 미지근했다. 이미 퀴닌(quinine)이라는 해열제가 민간에서 쓰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다 건너 오는 퀴닌만 믿으면 되는 세상이었고 당시 영국은 바다를 지배하고 있었기에 스톤의 연구 결과는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런데 그 바닷길이 막힌다.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령이다. 유럽 대륙을 제패하고 기고만장하던 프랑스의 젊은 황제 나폴레옹은, 트라팔가 해전에서 넬슨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함대에 참패한 후 현실을 깨닫고 영국과의 교역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다. 트라팔가 해전이 끝난 지 일 년 후인 1806년 11월, 이렇게 바다가 막혔다. 그러나 정작 힘든 것은 프랑스였다. 영국은 어차피 식민지에서 막대한 재화를 끌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해군력이 없는데 프랑스가 어떻게 영국과의 교역을 막는다는 말인가. 프랑스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은 유럽 대륙이었다. 그렇게 영국은 살찌고, 유럽 대륙은 굶주리는 기이한 시절이 지속되었다.
더 힘든 곳은 독일(당시 프로이센)이었다. 문제의 발단인 프랑스는 그래도 어쨌든 유럽의 지배국가였고 꾸역꾸역 버티고 있었지만 프로이센은 교역 없이 살아남기 어려웠다. 특히 문제가 된 것은 해열제. 영국은 퀴닌을 그럭저럭 쓸 수 있었고, 다른 나라도 밀무역으로 수입해서 쓸 수 있었다. 그런데 프랑스와 비교적 가까운 곳에 위치한 프로이센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마치 감독관 바로 앞에서 시험을 보는 학생처럼 프로이센은 아무런 꼼수를 부리지 못했다. 대신 공부를 했다. 독일답다.
독일의 학자들이 공부했던 것은 수많은 문헌들이었다. 퀴닌을 구할 수 없다면 다른 물질로라도 열을 내려야만 했다. 그렇게 참고서적을 훓어보던 중에 학자들의 눈에 띈 것이 스톤의 연구결과였다. 정작 영국의 학자들은 별로 주목하지 않았지만, 급했던 독일 학자들은 호숫가로 달려가 버드나무 껍질을 벗겼고 적절한 방식으로 추출한 후 신묘하기만 한 해열효과를 만끽할 수 있었다.
이후 나폴레옹이 실각하고 바다는 풀렸지만 독일 학자들은 다시 퀴닌에만 집착하지 않았다.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으면 안 된다는 격언을 접한 투자자처럼, 해열제도 퀴닌 외에 버드나무 껍질 추출액을 계속해서 연구하려 했다. 그리고 그 연구는 결실을 맺는다. 버드나무 껍질 추출액에서 실제 해열 효과를 보이는 물질, 살리신(salicin)을 찾은 것이다. 이후 살리신은 살리실산(salicylic acid)으로 진화한다. 귀하게 구한 살리신을 가수분해하고 산화반응을 수행해 소염진통효과가 뛰어난 살리실산으로 바꾼 것이다. 나름 그 시절의 의약화학이다.
살리실산에 다시 한 번 변화의 계기가 찾아온 것은 1859년이다. 독일의 화학자 헤르만 콜베(Hermann Kolbe)와 그의 조수 루돌프 슈미트(Rudolf Schmitt)가 순수하게 화학적인 방법으로 살리실산을 만든 것이다. 출발물질은 놀랍게도 석탄 찌꺼기인 페놀과 수산화나트륨, 그리고 이산화탄소였다. 별 볼일 없는 물질과 산업 쓰레기를 이용해 귀하기 짝이 없는 살리실산을 만들어낸 것은 연금술로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놀라운 혁신이다. 이제 학자들은 더 이상 살리실산을 얻기 위해 인부들을 모아 버드나무 껍질을 벗겨내고 산과 염기 등을 이용해 살리신을 추출한 다음, 다시 산과 산화제를 이용해 살리실산을 만들 필요가 없었다. 실험실로 가서 알려진 방법에 따라 만들기만 하면 되었다. 지금도 일반화학 시간에 필수로 배우는 이 반응을 콜베-슈미트 반응이라고 부른다.
이 방법이 놀라운 이유는 두 가지 더 있다. 우선 당시는 주기율표도 나와 있지 않던 시절이었다. 즉, 원소가 어떻게 결합하는지에 대해 잘 모르던 시절의 화학자가 구조식도 없이 유기화합물을 새로이 만들어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독일의 두 화학자는 기적을 만들어 냈다.
이 반응이 가지는 또 다른 의의는 살리실산의 구조를 알아냈다는 점이다. 추출하고 분리해서 하얀 가루로 가지고 있다고 해서 구조를 파악할 수는 없다. 구조는 화학적 분석이나 실험을 통해서 알 수 있는데, 전혀 다른 방법으로 간단한 물질에서 살리실산을 합성해 버렸다. 그러므로 구조도 유추할 수 있는 것이다.
구조를 안다는 것은 보다 나은 물질로 전환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구조를 모르는 채로 활성을 올릴 수는 있지만 그래도 장님 코끼리 만지는 수준을 넘어서기는 어렵다. 그보다는 생긴 모양을 알고 핵심을 접근할 때 제대로 된 혁신이 나올 것이 당연하다. 이후 사람들은 살리실산의 구조에 기반해 여러 가지 반응을 수행했고 결국 아세틸살리실산이라는 물질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우리가 오늘날 아스피린이라는 이름으로 접하는 바로 그 의약품의 대명사가 이렇게 태어났다.
백승만 교수는 서울대학교 제약학과 졸업후 동 대학원에서 생리활성 천연물의 화학적 합성에 관한 연구로 약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텍사스 사우스웨스턴 의과대학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11년부터 경상국립대학교 약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의약화학을 강의·연구하고 있다. 현재 파킨슨병과 같은 퇴행성 뇌질환 치료제를 연구 개발하고 있으며 약의 역사도 함께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전쟁과 약, 기나긴 악연의 역사’ ‘분자 조각자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