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각기병
산업혁명과 도시화 이후 인구가 늘어나고 식량이 부족해지면서 학자들은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사람들을 먹일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했다. 3대 영양소와 같은 개념이 주로 19세기 초에 연구되었고 약간의 혁신도 이뤄졌다. 그러나 당시 분석 기술의 한계로 인해 미량으로 존재하는 필수 영양소에 대해서는 제대로 파악을 하지 못했다. 이 미량이지만 없어서는 안 될 영양소에 대해서 본격적인 연구가 이루어진 것은 19세기 후반에 들어서였다.
비타민B1이 대표적이다. 티아민(Thiamine)이라고도 부르는 이 물질은 자바섬에 근무하던 네덜란드 태생의 군의관이 닭의 사료를 연구해 분리한 물질이다. 잘 도정된 쌀, 즉 쌀겨가 떨어져 나간 사료를 먹은 닭은 각기병으로 시름시름 앓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료를 먹은 닭은 건강했기에 이 군의관 크리스티안 에이크만(Christiaan Eijkman)은 쌀겨에서 실마리를 찾으려 했고 이후 노벨상까지 받는다. 나름 성공신화다.
그런데 각기병의 해법을 찾아낸 사람이 이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에이크만이 각기병의 원인을 찾아내기도 전인 1884년 일본의 한 해군 장교도 각기병에 대해서 연구하고 있었다. 다카기 가네히로라는 일본의 군의관은 영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후 해군 장교로 부임해서 본격적으로 각기병을 연구하고 있었다. 당시 각기병은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을 시작으로 영양결핍으로 인해 죽음에 이르는 질병이었다. 일반적인 영양결핍이라면 잘 먹이면 되겠지만 각기병은 이상하게 아무리 잘 먹여도 낫지 않았다. 1883년 훈련 중이던 쓰쿠바호에서는 276명의 선원 중 169명이 각기병을 앓았고 그중 25명이 죽었다. 해결하지 못하면 답이 없었다.
다카기는 선원들을 나누어 다양한 음식을 제공했다. 그리고 비교적 쉽게 해결책을 찾았다. 도정을 해서 쌀겨가 떨어져 나간 쌀은 아무리 먹어도 각기병이 나타났다. 하지만 도정을 하지 않은 보리로 밥을 먹였을 때에는 각기병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 간단한 해법을 들고서 다카기는 해군들에게 보리밥을 먹이려 했다. 하지만 해군은 맛있고 귀한 쌀밥 대신 맛없고 값싼 보리밥을 먹이려는 시도에 반발했고 오히려 그를 ‘보리밥남작’으로 부르며 비아냥거렸다. 뭔가 유연한 해결책이 필요했다. 그리고 다카기에게는 이런 유연함이 있었다.
다카기가 제시한 방법은 카레라이스였다. 카레는 인도의 향신료였지만 19세기에는 영국에서 밀가루를 섞어서 카레가루로 판매하고 있었다. 영국에서 유학하던 당시에 영국의 선원들이 카레 스튜를 먹는 것을 유심히 지켜봤던 다카기는 이 요리를 응용해서 카레라이스를 제공하게 했다. 카레의 밀가루는 티아민을 함유하고 있었고 카레라이스에 적당히 보리밥을 섞어도 선원들은 선진국 요리라며 그다지 반발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효과는 확실했다. 1884년 쓰쿠바호는 장기원정을 다녀왔음에도 불구하고 겨우 14명의 각기병 환자만 발생했다. 이 14명도 심지어 카레라이스를 거부한 선원들이었다. 이처럼 효과가 확실해지자 더 이상 그를 ‘보리밥남작’이라 비아냥거리지도 않았고 그의 해법을 순순히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어쨌든 간에 살아 돌아오면 고마워하게 마련이다. 이후 일본 해군은 괴혈병을 해결한 영국 해군처럼 극동 아시아를 지배했고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의 발틱 함대를 무찌르는 기염을 토한다.
각기병에 대한 실질적 해법을 찾았다고 해서 원인까지 규명되는 것은 아니다. 원인을 찾아낸 사람은 앞서 언급한 에이크만이지만, 정작 비슷한 시기 일본에서도 다른 학자가 티아민을 찾아냈다. 스즈키 우메타로라는 이 학자는 심지어 분리한 물질을 ‘오리자닌’이라는 이름으로 시판까지 했다. 각기병 치료제 연구의 이정표라고도 부를 수 있는 업적이며, 더이상 일본에서 각기병으로 고생하는 사람은 없어야 했다. 하지만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다.
모리 오가이는 독일에서 유학한 육군 군의관이었다. 그가 보기에 해군에서 찾아낸 해법이나 시판 중인 오리자닌은 전혀 답이 아니었다. 그는 독일에서 질병의 원인은 세균 감염이라고 배웠고, 그 세균을 어떻게 확인하고 치료하는지에 대해서도 소상히 연구했다. 그래서 그는 각기병도 ‘각기균’에 의한 감염증이라고 미리 결론 짓고 그 균을 찾기 위해 연구했다. 그 균을 찾아서 백신을 만든다면 군인들이 먹고 싶은 쌀밥 마음껏 먹고 싸울 수 있을 것으로 그는 내다보았다.
하지만 존재하지도 않는 각기균을 찾을 수는 없는 노릇. 그의 고집 아래 일본 육군은 점점 약해져 갔다. 그리고 전선이 길어지고 보급이 어려울수록 그의 판단 착오는 크게 나타났다. 만주에서 벌였던 러일전쟁은 그 결정타였다. 러일전쟁으로 죽은 일본군은 대략 8만 4천 명으로 추산하는데 그중 각기병으로 죽은 사람이 약 2만 7천 명이다. 각기병으로 제대로 싸울 수 없는 군인들까지 감안하면 일본군은 당시 러시아군 외에 각기병과 싸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리 오가이가 유학을 했던 독일은 당시 감염 이론을 완성하고 많은 질병의 원인을 찾아내어 인류의 건강에 이바지한 나라다. 하지만 모든 질병이 감염증인 것은 아니다. 수십만 년간 진화한 인체의 신비 앞에 당시 과학이 가지는 수준은 기껏해야 걸음마 수준이 아니었을까? 자연 앞에 겸손하지 않았던 모리 오가이와 일본 육군은 혹독하게 그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백승만 교수는 서울대학교 제약학과 졸업후 동 대학원에서 생리활성 천연물의 화학적 합성에 관한 연구로 약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텍사스 사우스웨스턴 의과대학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11년부터 경상국립대학교 약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의약화학을 강의·연구하고 있다. 현재 파킨슨병과 같은 퇴행성 뇌질환 치료제를 연구 개발하고 있으며 약의 역사도 함께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전쟁과 약, 기나긴 악연의 역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