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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약이라는 걸 알려줘도 긍정적 효과를 낼 수 있을까? 그렇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독일 연구팀은 편두통 환자 120명에게 플라시보임을 공개한 알약을 3개월간 복용하게 했다. 그 결과 두통 발생 빈도 자체는 줄지 않았지만 환자의 삶의 질은 개선됐고 두통으로 인한 장애 정도도 유의미하게 감소했다. 약효 성분이 없다는 걸 알고 먹은 공개 라벨 플라시보(Open-label placebo, OLP)의 효과였다. 참가자 평균 연령은 34세, 여성이 86%였다. 이들 대부분(85%)은 한 달에 두통 일수가 15일 미만으로 나타나는 삽화성 편두통, 나머지는 만성 편두통이었다. 이 연구는 10월 8일 JAMA Network Open에 온라인으로 게재되었다.
참가자의 약 절반인 58명은 일반적인 예방 요법 외에도 "플라시보 — 활성 성분 없음"이라고 명확하게 표시된 용기에 담긴 OLP 알약을 하루 두 번 복용했다. 나머지 62명은 표준 치료만 계속했다. 전체적으로 약보다 비약물 예방법을 사용한 사람이 많아서 편두통 예방약을 복용한 사람이 1/3, 나머지 2/3는 운동, 이완 기법과 같은 비약물적 방법을 사용했다. 이 비율은 공개 라벨 플라시보를 받은 쪽이나 그렇지 않은 쪽이나 비슷한 수준이었다.
3개월 후, 두 그룹 모두 두통 빈도와 강도가 개선됐지만 OLP와 일반 치료를 병행한 그룹과 일반 치료만 받은 그룹 사이에 유의미한 차이는 없었다. 급성 치료약 사용 일수도 비슷했다. 두통이 절반 이상 줄어든 환자 비율(50% 반응률)도 두 그룹에서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부차적 지표에서는 OLP가 분명한 이점을 보였다. 신체적 삶의 질 점수는 약 4점 상승했다. (편두통에 관해서는 아직 기준이 없지만 다른 통증 질환에서 3.3점 이상이면 임상적으로 의미 있는 변화로 본다.) 통증 관련 장애 점수는 약 6점 감소했으며, 두통이 일상생활에 미치는 영향도 소폭이지만 유의미하게 줄었다. OLP를 복용한 사람들의 거의 절반(47%)이 자신의 상태가 개선되었다고 평가한 반면, 일반 치료만 받은 사람들은 24%로 거의 두 배 차이가 났다. 쉽게 말해 오픈 라벨 플라시보가 편두통 빈도와 같은 객관적 지표에는 효과가 없지만 주관적 불편감을 개선하는 데는 가치있다는 의미이다.
플라시보라는 걸 알고 먹어도 효과가 나는 이유는 뭘까?
이전에는 플라시보 효과라고 하면 긍정적 기대에만 초점을 맞췄지만 공개 라벨 플라시보 연구는 그게 다가 아니라는 점을 알려준다. 이번 연구에 참여하진 않았지만 오랫동안 플라시보 연구를 해온 테드 캅추크 하버드의대 교수는 이런 플라시보 반응이 뇌가 감각을 자동 조절하는 과정에서 일어난다고 설명한다. 그저 나아질 거라는 기대만 효과를 내는 게 아니라 안전과 돌봄의 신호를 감지한 상태에서 뇌가 불쾌한 감각의 볼륨을 낮추기 때문이란 것이다.
이번 연구를 진행한 독일 연구진의 설명도 같은 맥락이다. 비활성이라고 공개된 플라시보 알약을 복용하는 행위 자체가 환자가 자신의 질환에 더 적극적으로 관여하도록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편두통 발작 횟수가 변하지 않더라도 일상에서 편두통 때문에 느끼는 불편함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이번 연구는 코로나19 시기에 진행되다 보니 원래 목표로 했던 150명에 비해 참가자 수가 120명으로 줄어들었다는 아쉬움이 있지만 공개 플라시보의 효과에 대한 이전 연구와 결을 같이한다.
이론적으로 플라시보 효과는 의사-환자 관계에 뿌리내린 치유 의례(healing ritual)에서 생겨난다. 실제로 의사-환자 관계는 플라시보 효과를 증강하는 데 핵심이라는 근거가 많다. 이번 연구에서는 대면 상호작용을 최소화하고, 사전 포장된 약과 표준화된 동영상 설명을 사용했기 때문에 의사-환자의 관계적 요소가 더 적었을 수 있고 그 결과 이전 연구들에 비해 OLP 효과가 과소평가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물론 편두통 예방약을 플라시보로 대체하라는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이번 연구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어떤 약을 왜 먹는지, 약 먹고 나서 내 몸 상태가 어떤지 주의를 기울이는 것만으로도 치료의 체감 효과는 더 커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