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 페니실린 이야기가 감춘 진실
정재훈 기자 @ 뉴스 뷰 페이지 검색 버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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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훈 약사.

페니실린하면 플레밍부터 떠올린다. 어느 날 창문을 열어둔 실험실에 우연히 날아든 곰팡이가 세균 배양접시에 떨어졌고, 플레밍 박사는 그 곰팡이가 세균을 죽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이후 항생제의 시대가 열리며 수많은 생명을 구했다. 마치 영화 같은 이야기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절반만 사실이고, 나머지는 신화에 가깝다.

알렉산더 플레밍이 페니실린을 처음으로 발견한 것은 사실이다. 1928년 시골 집에 휴가를 다녀온 플레밍은 포도상구균 배지가 곰팡이로 오염되고 그 주변이 말끔하게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이상하다고 여겼다. 플레밍은 곰팡이에서 무언가 항균 물질이 나와 균을 죽이고 있다고 추측했고, 그 물질에 페니실린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여기까지는 흔히 알려진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흔히 이야기하는 “창문을 열고 날아든 곰팡이” 장면은 사실과 다를 가능성이 크다. 과학 저술가 키스 베로니즈는 <약국 안의 세계사>에서 당시 플레밍의 연구실이 창문을 열기 어렵게 되어 있어서 거의 닫혀 있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오히려 플레밍의 아래층에 있던 곰팡이 연구자 C. J. 라투슈(La Touche)의 실험실에서 공기를 타고 페니실리움 포자가 올라왔을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것이다. 실제로 라투슈가 플레밍에게 항균력 테스트를 위해 다른 곰팡이 샘플을 제공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라투슈가 실험실에 페니실리움 곰팡이 샘플도 가지고 있었다고 보는 게 타당해 보인다.  

신화에 가려진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1944년 타임지는 플레밍을 표지에 싣고 “페니실린은 전쟁이 앗아가는 생명보다 더 많은 생명을 구할 것이다”라고 썼다. 하지만 플레밍은 페니실린을 발견했을 뿐 이를 실제 약으로 만들지는 못했다. 페니실린은 너무 불안정해서 순수하게 추출하거나 정제하는 데 어려움이 컸고, 플레밍도 결국 이를 포기했다. 1929년 플레밍은 페니실린의 발견에 대해 논문을 썼지만, 당시 과학계의 반응은 미지근했다. 그의 논문이 재조명되고 약으로 개발되기까지는 그로부터 약 10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페니실린을 진짜 약으로 만든 건 옥스퍼드의 하워드 플로리, 에른스트 체인, 노먼 히틀리, 에드워드 에이브러햄이었다. 1938년 체인과 플로리가 플레밍의 논문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본격적으로 페니실린을 추출하는 연구를 시작했다. 에이브러햄은 분자 구조를 밝혀내고 히틀리는 분리 정제와 대량생산에 기여했다. 연구팀은 동물실험과 인체 투여를 통해 마침내 페니실린의 효과를 입증했다.

이 과정에서 미생물학, 화학, 약리학 등 다양한 분야의 협력이 필요했고, 미국 정부와 제약회사의 대규모 지원도 필수적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페니실린의 대량 생산이 시작되었고 수많은 생명을 구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이는 플레밍 한 사람의 업적이 아닌 여러 사람의 공로였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 모든 과정을 덮어두고, 플레밍 혼자 우연히 약을 만든 이야기만 기억하고 있을까? 플레밍은 1945년 플로리, 체인과 함께 노벨상을 공동 수상했다. 노벨상은 3명까지만 공동 수상이 가능하다는 정관 때문에 히틀리와 에이브러햄은 상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언론은 우연한 발견이라는 감동적인 서사를 중심으로 수상자 중에서도 플레밍만 집중 조명했다. 덕분에 대중의 기억 속에서 그는 위대한 천재 과학자로 남게 되었고, 나머지 인물들은 역사에서 잊혔다.

페니실린의 역사를 살펴보면 과학 이야기에서 팩트가 왜 중요한지 확인할 수 있다. 과학은 우연이나 영감이 아니라 수많은 시행착오와 반복, 검증의 과정을 통해 완성된다. 과학을 마치 한 사람의 직감으로 탄생하는 마법처럼 보이게 하는 것은 잘못된 신화다. 흥미 위주의 과학 스토리텔링은 의심하고 탐구하는 태도를 가르쳐주지 못한다. 결국 과학을 질문의 대상이 아닌 맹목적 진리처럼 받아들이게 만들 위험이 있다.

페니실린의 진짜 이야기는 알려진 것보다 복잡하다. 페니실린은 우연히 발견된 기적의 약이 아니다. 반복되는 실패 속에서도 집요하게 사실을 추적한 여러 사람의 노력과 협업이 만든 성취다. 현대 과학이 믿을 만한 것은 멋진 이야기 때문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사실을 확인하고 또 확인했기 때문이다. 진정한 가치는 감동 스토리가 아니라 복잡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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