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고향의 이름 (1)
내 고향은 경기도 김포군 검단면 당하리 신기(新基) 부락이다. 동네 사람들은 ‘신기’ 보다는 ‘새텃말’이라고 불렀다. 우리 동네는 1995년 1월에 인천광역시 서구에 편입되었고, 금년 7월부터인가 검단구로 바뀐다고 한다. 그 새텃말이 2015년 검단 신도시 개발 공사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불도저가 산과 개울, 밭, 논 등을 밀어 부쳐 광활한 평야를 만들더니 그 위에 엄청난 규모의 고층 아파트 단지를 만들었다. 상전벽해(桑田碧海)도 이런 상전벽해가 없다.
논과 밭은 물론 내가 살던 집마저 흔적없이 사라졌다. 다행히 수용(收容)을 피해 하나 남은 작은 선산(先山)에 돌아가신 조상님들을 모셨다. 거기 산소에 갈 때면 멀리 보이는 옛 동네를 바라보며 ‘저기쯤이 우리집 자리일까?’ 하며 허허로운 마음을 달랜다.
고향이 사라지니 자연히 동네 이름들도 잊혀져간다. 이미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도 얼마 남지 않았다. 우리 동네 주변에는 둑실, 고꾸랑굴, 보무굴, 바랫벌, 괭메이, 매밭, 족조리, 바리미, 독쟁이라는 독특한 이름을 갖고 있는 마을(부락)들이 있었다. 이런 이름은 누가 뜻을 세워 지은 것이 아니라, 세월과 함께 저절로 그리 불리게 되었을 것이다. 이들 이름의 상당수는 ‘새텃말’이 ‘신기(新基)로 바뀐 것처럼 왜정 때 엉터리 한자어로 바뀌었다.
이들 동네가 왜 이런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을까? 평생 궁금하였지만, 내 짧은 실력으로 도무지 답을 알 수 없었다. 이때 문득 전지전능(?)한 비서인 챗지피티에게 가볍게 물었더니, 요샛말로 신박하게도 척척 답변을 해 주는 것이 아닌가? 챗지피티는 몰라도 아는 척하는 것이 문제이긴 하지만, 일단 이 정도의 답변을 들은 것도 큰 수확이었다. 기쁜 마음에 그 답변을 정리하여 이하에 소개한다.
챗지피티에 의하면 새텃말의 앞 동네인 ‘둑실’은 “방죽을 쌓아 물을 다스리던 마을의 중심이었다. 둑에서 논농사가 시작되었으니 ‘둑실’은 공동체의 생존을 지탱하는 핵심 공간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둑실에 큰 둑이 있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은 없었지만, 더 옛날에는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둑실의 왼쪽 건너편 깊은 곳에는 ‘고꾸랑골’이라고 하는 우스꽝스러운 이름의 작은 마을이 있었는데, 이는 “지세(地勢)가 갑자기 꺼지고 급해져 발을 헛디디면 고꾸라질 것 같은 동네”라는 의미라고 한다.
둑실 오른쪽 산너머에 있는 ‘보무굴’은 “낮은 물막이 시설인 ‘보’가 있었거나 무너졌던 골짜기를 가리키는 이름”이란다. 또 우리 동네를 바라볼 때 오른쪽으로 넓게 펼쳐진 ‘바랫벌’은 “작은 평야처럼 보이는 들판으로, 김포평야 특유의 저습지(低濕地) 농경 환경을 정확히 전하는 이름”이라고 한다. 나는 ‘멀리까지 바라다 보이는 들판’이라는 의미의 이름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바랫벌이 옛날에는 ‘저습지’였을지도 모르겠다.
우리 동네 우측 뒤에 있는 ‘괭메이(광명 光明)’라는 동네는 “괭이로 일군 밭을 뜻하는 이름으로, 논보다 앞선 개간의 기억을 품고 있다”고 한다. ‘괭메이’의 옆 동네인 ‘매밭’은 “매가 많이 날던 밭”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또 동네 뒤에 있는 됭고개(된고개, 가파른 고개)를 넘어가면 ‘족조리(족저, 足低))’라는 마을이 나오는데, 이는 “둑과 들 사이에 물길이 좁아지며 모이는 곳”이라는 의미로, “족조리처럼 오므라든 지형에서 물고기를 잡고 물을 가두던 풍경이 연상된다”고 한다. 글쎄, 쉽게 동의는 안되지만 달리 떠 오르는 생각도 없다.
족조리 우측 멀리 있는 ‘바리미 (발산, 發山)’라는 동네는 들판과 구릉이 맞닿는 끝자락에 있었는데, 이는 “넓은 벌의 가장자리이자 생활권의 경계를 알려주는 지명”이란다. 끝으로 우리 동네 좌측 산너머에 있는 ‘독쟁이’는 내 짐작대로 “옹기 독을 만들던 마을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지명(地名)은 오랫동안 거기에 살아온 사람들이 땅의 특징에 붙인 이름일 것이다. 그래서 옛 지명을 기억하는 일은 우리가 어떤 환경 속에서 살아왔는지 기억나게 하는 일이다. 고향이 사라지고 지명마저 잊혀지니 아련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다.

<필자소개> 심창구 교수(서울대 명예교수)는 서울대 약학대학 교수와 식품의약품안전청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종신회원으로 대한약학회 약학사분과학회 명예회장과 서울대 약학박물관 명예관장을 맡고 있다. 심 교수의 약창춘추 칼럼은 2007년 처음 게재된 이후 현재까지 약 400여 회 이상 집필을 이어오고 있는 가운데 그동안 3권(약창춘추, 약창춘추2, 약창춘추3) 책으로 묶여 순차적으로 발간된 바 있다. 가장 최근에 발간된 약창춘추3은 현재 교보문고를 비롯한 시중 인터넷 서점과 약업닷컴 북몰을 통해 구입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