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3> 약학의 특성 – 8. 규제
심창구 기자 @ 뉴스 뷰 페이지 검색 버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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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창구 교수.

제약(製藥)산업을 제약(制約)산업이라고도 합니다. 물론 다른 산업에도 규제(規制)는 많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생명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제약산업에 특히 규제가 많은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규제는 다들 싫어합니다. 그래서 정부는 선거철만 되면 각종 규제를 철폐하겠다고 발표해서 국민의 환심을 사려고 합니다.

그러나 규제는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나쁜 규제는 나쁘지만 좋은 규제는 오히려 도움이 됩니다. 기차와 철로(鐵路, rail)의 관계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기차는 철로 위로만 달리게 규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철로 위로만 달리라고 제한하느냐? 아무 데로나 다닐 수 있게 하자며 철로를 없애 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당장 기차가 달리 수 없게 되지 않겠습니까?

사실 철로는 규제가 아니라 기차가 빠르고 안전하게 달리도록 돕는 가이드라인입니다. 의약품관련 규제도 제약산업의 발전을 이끌어주는 가이드라인이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나쁜 규제입니다. 그런 규제는 폭이나 높낮이가 일정하지 않은 철로처럼 기차를 제대로 달릴 수 없게 만듭니다. 제약산업의 발전을 가로막습니다.

과거 우리나라의 규제는 품질이 좋지 않았습니다. 앞뒤가 모순되거나 애매하거나 필요한 부분이 누락되어 있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이런 규제에 제약산업이 순응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고생한 사람들은 아예 이런 규제들을 통째로 없애자고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그러나 규제를 아주 없앨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의약품의 안전성과 유효성의 보장은 정부가 마땅히 감당해야 할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대신 우리는 의약품 관련 규제의 품질을 높여 나쁜 규제를 좋은 가이드라인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의약품 관련 규제의 품질이 불량했던 이유 중의 하나는 규제전문가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의약품에 대한 규제 수준은 의약품의 유효성과 안전성을 평가하는 전문가의 안목의 높낮이에 의해 결정됩니다. 따라서 그 동안 우리나라 규제의 품질이 불량했다는 것은 약학자를 비롯한 평가과학 전문가의 수준이 미흡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평가과학 수준이 낮으면 규제의 품질을 높이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품질이 불량한 규제 하에서 세계최초의 신약이나 우수한 의약품이 개발되기는 어렵습니다. 새로운 약을 개발하고자 할 때에, 무슨 시험을 어떻게 해서 어떤 결과를 제출하면 정부가 승인해 줄지 미리 알 수 없는 환경에서는, 관련 규정(規定)과 규제는 기업을 괴롭히는 걸림돌에 불과합니다. 정답을 모르는 선생님이 가르치는 반에서 전교 1등 학생이 나올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불량한 규제 밑에서 세계최초의 우수한 의약품이 개발될 수 없습니다.  

만약에 정교하게 만들어진 규정이 사전에 공지되어 있는 상황이면 개발자는 이 규정대로만 시험을 진행하면 되므로 불필요한 시험에 시간과 돈을 낭비하지 않아도 됩니다. 국제 경쟁력이 생기는 것이지요. 이 때 비로소 규제가 가이드라인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사실 우리의 규제 수준이 과거에는 좀 험악했습니다.

또 개발자가 시험성적서를 규제 당국에 제출하면 그 때부터 규제기관 담당자들이 정답이 무엇일까 공부를 시작하는 바람에 시간이 엄청나게 지연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신약개발 경험을 축적한 오늘날 우리나라의 규제 수준도 매우 높아졌습니다. 그러나 세계 최고의 수준의 규제(선생님)가 있어야 세계 최고의 의약품(우등생)이 탄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스마트한 규제, 즉 부족하지도 지나치지도 않은 규정이 미리 제시되어 있는 환경 하에서의 신약개발이 최고의 경쟁력을 가질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제 우리나라 제약기업의 개발 수준이 눈부시게 높아졌기 때문에 정부 규제의 품질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높여야 합니다.

이 시점에서 평가과학(評價科學)의 본산(本山)임을 자처하는 약학은, 우리나라의 의약품관련 규제 수준을 세계 최고로 높이기 위한 노력을 다짐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지금 상황이 그렇습니다. 약대 후배 교수님들의 분발을 촉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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