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7> 아버지의 이력서
심창구 기자 @ 뉴스 뷰 페이지 검색 버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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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창구 교수. © 약업신문

나는 아버지가 소찬하시기 몇 년 전에 아버지 이력서 1통을 받아 놓았다. 명색이 장남인 내가 아버지께서 젊으셨을 적에 어디서 공부하고 무슨 생각을 하시며 사셨는지 별로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 부끄러웠기 때문이었다. 아버지 이력서는 간단해서 정보가 그리 많지 않았지만, 그래도 중학교 졸업식 사진을 수운회관에서 찍으셨고, 졸업 후에는 삼천포에 가서 건축기사로 근무하셨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때 무슨 생각을 하시며 사셨는지에 대해서는 차차 여쭤봐야지 하다가 결국 때를 놓치고 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의 정신이 안 좋아지셨기 때문이었다.

이 일을 계기로 세상의 자식들이 부모님의 일생에 대해 얼마나 무심한지 돌아보게 되었다. 그래서 기회가 되는대로 사람들에게 부모님의 이력서라도 하나 받아 놓으라고 조언하고 있다. 혹시 효성이 있어 보이는 사람에게는 가능하면 부모님 자서전을 만들어드리라고 권유해 보기도 한다. 정년퇴임을 앞 둔 아버지를 위해 자서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어떤 아들을 만나서는 그 대견함을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하기도 했다.  

우리 인생은 긴 듯 짧아서, 나도 어느덧 죽음을 베겟 머리에 두고 잠자리에 드는 나이가 되었다. 젊었을 때의 꿈과 기개가 사라져 버린 노인의 바램은 무엇일까? 크리스찬은 천국에 대한 소망으로 산다지만, 나는 이에 더하여 나의 삶이 후손들에게 조금이나마 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갖는다.

오늘날 젊은 사람들은 돌아가신 조상을 추모할 시간적 정신적 여유를 갖지 못하고 산다. 또 자기가 본 적이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까지가 어쩌다가라도 추모하는 조상의 상한선이 되었다. 본 적도 없는 증조할아버지 이상은 사실상 조상으로 느끼지도 않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아이들에게 그들이 보지도 못한 조상의 생활과 가르침을 어떻게 전할 수 있을까? 어쩌다 손주들에게 이야기를 해 주려다가도 결코 아이들이 이해할 수 없을 것임을 깨닫고 이내 입을 닫는다. 대신 조상의 상한선인 내 이야기라도 제대로 전해 봐야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부모님의 자서전이나 이력서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고 홍문화 교수님 때문이었다. 홍 교수님은 그를 모르면 간첩이라고 할 만큼 20세기 한 시대를 풍미한 약계 최고의 명사(名士)이셨다. 그런데 그럼 명사를 아는 약학도가 오늘날 아무도 없다. 당대의 영웅호걸도 세월이 흐르면 완전히 잊혀진다는 사실이 너무나 허망(虛妄)하였다.

그래서 홍교수님을 평전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평전을 쓰면서 유족들께 몇 가지 사항을 문의하게 되었는데, 놀랍게도 자손들도 아버지의 젊은 날에 대해 알지 못하는 사실이 많았다. 오히려 그들이 내가 쓴 평전을 보고 아버지에 대해 처음으로 알게 된 사실이 적지 않다고 했다.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100년사’를 펴낸 후, 광복 직후의 학장 서리였던 김기우님의 딸들이 감사하다고 연락을 해 왔다. 그동안 아버지의 사진 하나 변변히 없어서 이 책에 실린 아버지 사진을 확대 복사하여 집안에 걸어 놓았다고 한다. 이런 일들이 과거에 대한 기록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만들어 주었다.

약학사 연구 과정에서, 경성약전을 졸업한 아버지의 흔적을 문의해 오는 아들, 그리고 아버지의 일생을 정성껏 논문으로 작성하여 제출하는 효자, 또 월북한 아버지에 관한 자료를 백방으로 수소문하는 아들도 보았다. 이런 자식들을 둔 고인은 혼이 있다면 필경 고마워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이 내가 세상의 자식들에게 부모님 이력서를 받아 놓으라 하고 더 나아가서는 부모님 자서전 쓰기를 권장하고 있는 배경인 것이다.

아직 나는 틈나는 대로 이런 저런 글을 쓰고 있는데, 이는 언젠가 내 손주들이 철이 들어(?) 혹시 내 글을 읽을 때에, 자기들이 할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음을 깨닫기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그 깨달음이 험한 세상을 사는 그 아이들에게 작은 위로가 되고 격려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몇 명의 손주들에게라도 작지만 선한 영향력을 미칠 수만 있다면, 노년의 삶과 말과 글이 마냥 쓸데없기만 한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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