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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두 아들의 고난도 결코 만만치 않았다. 내가 수술을 받기 7년 전인 1987년, 기침을 자주 하던 아내는 서울대병원에서 폐기관지가 작은 돌들에 의해 막혀 폐포(肺胞)가 쭈그러졌다는 진단을 받았다. 외과 의사는 방치하면 폐암으로 진행될 우려가 크니 쭈그러진 폐 부위를 절제하자고 했다.
그러나 기관지내과의 김영환 교수는 기관지 내시경을 통해 돌을 빼는 시도를 해보자고 하였다. 결과적으로 내시경을 사용하여 일부 돌을 빼낼 수 있었다. 기적이었다.
신기한 것은 내시경 전날밤 아내의 꿈에 예수님 같은 분이 나타나 아내의 가슴 위에 손을 펴며 이제 다 낳았다고 했다는 것이다. 김 교수님은 우리가 일본에서 살던 집의 지점토(紙粘土) 벽지 부스러기와 곰팡이가 기관지 안에서 오랜 세월에 걸쳐 돌을 형성한 것 같다고 추정하였다.
1년 후 X레이 결과 폐포는 기적적으로 회복되어 있었다. 폐포가 펴지지 않았으면 폐를 절제해야 할 상황이었다. 김 교수님은 아내 생명의 은인이다. 만약에 외과의사의 의견대로 폐를 절제했더라면 아내는 십중팔구 수술 후유증을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다.
두 아들은 나의 일본 유학 시절에 천식으로 큰 고생을 하다가, 내가 학위를 마치고 귀국한 1982년 이후 많이 좋아졌었다. 그런데 1988년 퍼듀대학에 함께 가 있을 때 초등학생이던 큰 아이가 어쩌다 포이즌 아이비와 접촉한 후 아토피 증상이 심해졌다. 고등학교 때는 옴 몸이 가려워 스테로이드 주사를 맞지 않으면 학교에 갈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아이가 스테로이드 주사를 맞았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그 상황 속에서도 큰 아이는 1995년에 서울대 약대에 합격하였다. 내가 1994년 수술 이후 암 투병을 하는 와중에, 더구나 잠시도 긁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지독한 가려움 속에서 이뤄낸 결과였다.
그 애는 학부 졸업 후 약대 대학원에 들어갔을 때, 스테로이드 과용으로 인해 오른쪽 눈의 망막이 박리(剝離)되는 이중의 고통을 겪었다. 서울대 병원 안과에 4개월간 입원하여 망막을 붙이는 여러 처치를 받았으나, 결국 실패하여 온 가족이 깊은 낙심에 빠지게 되었다.
그 때 미국 FDA에 근무하는 대학 동기이자 믿음의 친구인 박찬효 박사의 주선으로 2000년 12월 2일 볼티모어에 있는 존스 홉킨스 대학병원에 가서 망막을 붙이는 수술을 받았다. 결과는 대성공으로 이로써 한쪽 눈 실명의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우리 아이의 망막을 위해 함께 기도해준 서울대 안과 최장기 입원 환자(권사) 한 분도 우리 아이의 회복 소식을 듣고 존스 홉킨스 병원으로 달려와 망막을 붙였다. 기도의 위력에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시력을 회복한 큰 아이는 2005년에 결혼하여 예쁜 딸 셋을 낳고, 현재 인천에 신설된 모 약대에 교수로 근무 중이다. 그가 스스로 자동차 운전을 하고 다닐 수 있게 되었을 때, ‘이제야 가장이 된 것 같다’고 기뻐하였다.
그는 뉴욕에서 약국을 경영하는 내 대학 동기 김용진 약사를 찾아간 일도 신기한 일이었다. 김약사의 추천으로 홍삼 엑스를 대량으로 장기간 복용한 결과 얼마 후 그는 그 지긋지긋하던 아토피에서도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두 명의 내 친구를 통해 역사하신 하나님 은혜로 아토피와 망막 박리라는 겹 고난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게 된 것이다.
형보다 가족의 관심을 덜 받을 수밖에 없었던 환경 속에서 둘째 아들도 1997년 고려대학교에 합격하였다. 졸업 후 입소한 훈련소에서는 천식이 발견되어 병역면제 판정을 받고 사흘만에 귀가하였다. 그러나 그때 이회창 대선 후보 아들의 병역 문제가 이슈가 되자 병무청으로부터 재검(再檢) 통지를 받게 되었다.
이에 그는 컴퓨터 그래픽 디자인 공부에 몰입하여 자격증을 딴 후 병역 특례 게임 회사에 취직함으로써 대체복무의 길을 선택한 하였다. 이 회사에서의 경험이 나중에 그를 게임회사를 창업하게 만들었는데, 이 회사는 초기의 엄청난 실패를 잘 극복한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우리에게 적지 않은 고난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극복하게 역사하신 하나님 은혜에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