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치료를 받는 도중 및 후에도 아내의 간호는 헌신적이었다. 치료가 끝난 어느 주일, 아내는 숫기가 모자라는 나를 온누리 교회의 당회장실(堂會長室)로 끌고 가 그때부터 2년간 고 하용조 목사님의 기도를 매주 받게 하였다. 당시 유한양행 연구소장이던 이종욱 박사도 동행하여 함께 기도를 받았다.
이 박사는 내가 수술을 받고 병원에 누워 있자 한걸음에 달려와 “너를 위해 무엇을 해 주면 좋겠냐?”고 물었다. 내가 “나를 위해 교회에 다녀 주면 좋겠다”고 하자 그는 그 바쁜 와중에도 그때부터 나를 위해 온 누리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교회 ‘다녀 주기’는 수술을 한 박재갑 교수님이 “이제 심창구가 직장암으로 죽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말을 할 때까지 꼬박 5년간 계속되었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마운 일이다. 이 이야기는 2007년 10월 19일자 『국민일보』에 “나는 왜 크리스챤 인가?”란 제목으로 실려 있다.
수술 후 2년이 지나 항문 복원 수술을 받았다. 나는 배 밖으로 돌출된 항문 부위만 배 속으로 집어넣으면 되는 간단한 수술인 줄 알았다. 박교수님도 그렇게 설명했었다. 그래서 방사선 조사와 항암제 주사를 맞는 동안 복원 수술에 대해 별 걱정없이 지낼 수 있었다. 그런데 막상 닥치고 보니 복원 수술도 관장, 마취, 개복에 이르는 전 과정이 처음에 받았던 수술과 마찬가지로 힘들었다. 수술 후 방귀가 잘 나오지 않아 고생하는 것까지 똑 같았다. 박 교수님의 선의의 거짓말(?)에 속아 마음 편히 지낸 것이 다행이었다. 여러모로 박 교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수술 후 5년이 지났을 때 연구실의 동료 교수들이 축하 모임을 해 주었다. 15년이 되었을 때는 주변에서 “이제 정말 나았네요” 하는 말도 해 주었다. 그러나 15년이 지났다고 방심할 수는 없었다. 성경에 나오는 그 믿음 좋은 왕 히스기야도 겨우(?) 15 년간 생명을 연장 받지 않았는가?
그 후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었는데 2009년 8월 10일, 점심 식사 후 배가 너무 아파 서울대 보라매병원 응급실로 실려 갔다. 이날 점심에 쇠고기 구이(차돌박이)를 먹고 후식(後食)으로 아이스크림을 먹은 것이 화근(禍根)이었다. 쇠고기 기름이 응고되어 장폐색을 일으키지 않았나 싶다. 응급실에서는 간단한 장폐색(腸閉塞)이 아니라고 하면서 원 수술을 했던 서울대 본원으로 이송시켜 주었다.
그래서 서울대 병원에 세번째로 입원해 또 다른 박 교수님에게 개복 수술을 받았다. 그는 ‘내 장(腸)이 엉망으로 유착(癒着)되어 있어 소장을 28cm나 잘라냈다’고 하였다. 세 번째 개복 수술은 정말 힘들었다. 한번만 더 이런 수술을 받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구나 하는 공포감이 엄습(掩襲)하였다.
오랜 기간 입원 끝에 겨우 겨우 회복해서 다시 학교에 나가고, 정년 퇴직을 하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비록 3회에 걸친 개복 수술의 후유증으로 배변(排便)이 불순(不順)하여 ‘삶의 질’이 낮아진 생활을 하고 있지만, 지금 내가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정년을 몇 년 앞두고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우울증에 걸려 몇 년 동안 정신과에 다니는 고생을 하기도 했다. 백약(百藥)이 무효였지만, 그때 큰아들 네의 세 손녀들을 돌보며 지냄으로써 우울증을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었다. 우울증에는 손주가 명약이었다.
내가 아파보니 평생 편찮으셨던 어머님 생각이 자꾸 떠오른다. 어머니는 농사 일로 생긴 관절염으로 고생하시다가 장남인 내가 서울로 모신 지 몇 년 되지 않았을 때, 당뇨병에 골반골절, 그리고 뒤 이은 뇌경색과 뇌출혈로 10개월간이나 입원하시다가 돌아가셨다. 억척같이 일만 하시고 호강 한번 제대로 못 하신 어머니를 생각하면 정말 가슴이 아릿하다. 어머니는 내가 아픈 것을 차마 보고 싶지 않으셨던지, 내가 암에 걸리기 두 해 전인 1992년 71세의 연세로 돌아가셨다. 어머니와 사별 후 따로 사시던 아버지는 2014년 12월 온누리 교회에서 세례를 받으셨고, 2017년부터 우리와 함께 사시다가 97세의 연세로 소천하셨다. 아버지의 장수가 내게 위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