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콧줄(Levin tube)이 얼마나 불편한지는 경험해 본 사람은 다 알 것이다. 방귀가 안 나와 창자가 부풀고 배가 아프게 되자 젊은 의사는 당연히 콧줄을 다시 삽입하려 들었다. 얼마 동안은 박재갑 교수님의 빽(?)으로 삽입을 막았지만 장의 상황은 더 이상 버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문득 약대 김낙두 교수님이 예전에 같은 문제로 고생하다가 한의사 친구분께 침을 맞고 방귀가 나왔다고 하신 말씀이 생각나 전화를 드렸다. 다음날 그 친구분이 이번에는 다른 방법을 알려주셨다고 했다. 즉 A와 B라는 생약(生藥)을 끓여 마셔 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물도 못 마시는 내가 그걸 마실 수는 없었다. 생각 끝에 A와 B를 끓인 액을 반 스푼도 안되게 농축해서 핥아 먹었다.
효과는 극적이었다. 놀랍게도 먹은 즉시 장이 편안해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어찌나 신이 나는지 약액(藥液)이 창자에 골고루 접촉할 수 있도록 밤새 몸을 뒤척였다. 다음날 아침, 다시 콧줄을 들고 온 의사에게 이제 장이 편안해졌으니 콧줄을 삽입하지 말자고 말하였다. 생약 추출액을 먹었다는 이야기는 차마 할 수 없었다. 미심쩍어 하는 의사는 그럼 장 촬영을 한번 해 보자고 하였다. 촬영 결과 잔뜩 부풀었던 장이 현저하게 회복되어 있었다. 그래서 콧줄 끼우기를 한번 더 연기 받았다. 희망(?)에 부푼 나는 당장 AB 졸인 액을 한번 더 마셨다. 그리고 마침내 방귀 뀌기에 성공하였다. 할렐루야!
방귀 문제는 장 수술 환자들에게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식사도 퇴원도 방귀가 나와야 가능해진다. 이 경험은 뒤에 내가 AB를 대상으로 장운동축진제(prokinetic agent) 개발 연구에 도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드디어 며칠 후 퇴원하여 귀가하였다. 인공항문(artificial anus)을 단 채였지만, 집으로의 무사(無死)귀환은 감격이었다. 몹시 불편하던 인공항문도 차츰 익숙해지자, 외출도 하고 심지어 줄넘기도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얼마 지나자 아내의 도움없이 인공항문에 달린 플라스틱 백을 뒷처리 할 수 있게 되었고, 배 밖으로 노출된 인공항문 부위를 햇볕으로 소독할 줄도 알게 되었다.
퇴원 후 두 달간 매주 방사선 조사(照射)를 받은 뒤, 1년 동안 한 달에 5일씩 연속해서 5-FU라는 항암제 주사를 맞아야 했다. 주사를 맞은 첫날은 의외로 몇 시간 동안 아무렇지도 않아서 ‘아마 나는 항암제 고생은 좀 덜 하려나 보다’ 생각하였다. 그러나 웬걸! 저녁이 되자 입안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고 고개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정도로 온몸의 기운이 다 빠져나가는 상황이 되었다.
그래서 다음날 주사 처방을 내린 내과의 고 김노경 교수님에게 가서 ‘힘들어서 도저히 주사를 못 맞겠다’고 호소하였다. 김교수님은 주사 용량을 절반으로 줄여 주었다. 그랬더니 한결 견딜만해졌다. 이를 본 아내는 주사용량을 줄여 준 김교수님을 명의(名醫)라고 칭송하였다. 그래도 닷새간 주사를 맞고 나면 밥맛도 기운도 다 사라져 1주일 이상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1년 정도 지나고부터는 김 교수님의 배려로 집에서 가까운 삼성의료원에 가서 주사를 맞았다.
한 달 후 정해진 날에 다시 주사를 맞기 위해서는 사전에 혈액 검사를 통해 각종 혈액 수치가 회복되었음을 확인해야 한다. 나는 다른 수치는 괜찮았는데 혈소판 수치가 잘 회복되지 않아 예정된 날보다 1~2주일 뒤에야 주사를 맞을 수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1년이면 끝날 주사를 1년 6개월에 걸쳐 맞아야 했다.
치료 기간 중, 아내의 호소(?)에 못 이겨 고기는 먹지 못하였다. 대신 가끔 복지리와 순두부를 먹었다. 어쩌다 내 식사를 구경한 사람은 아내가 나를 구박하는 줄로 알았단다. 이때 약대 박정일 교수가 열처리 인삼[선삼(仙蔘)의 재료]을 대주었다. 나는 이 인삼 끓인 물을 콜라병에 담아 놓고 수시로 마셨다.
내가 수술을 받은 1994년 5월, 두 아들은 각각 고3과 고1이었다. 병 간호에 전념하는 아내를 대신해 장모님이 우리집 살림을 도맡아 주셔야 했다. 장모님의 상심이 얼마나 컸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