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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미국 방문을 끝내고 귀국하여 연구와 강의, 학회 일 등으로 분주하게 지내고 있던 1994년 4월의 어느 날, 몇 명의 교수들과 약사회관 근처에서 저녁을 먹고 화장실에 갔다가 깜짝 놀랐다. 대변을 보고 일어나 보니 변기(便器)가 온통 빨간색이었다. 그래서 5월 12일 서울대 병원 외과의 박재갑 교수님의 진찰을 받았다. 박 교수님은 직장에 손가락을 넣어 보더니 그 자리에서 직장암이라고 했다. 정신이 하얘졌다. 심란한 가운데도 운전에 조심하며 자곡동 집으로 돌아왔다.
당장 이 이야기를 아내에게 어떻게 꺼낼 것인가부터 걱정이었다. 나는 동네 뒷산 약수터로 물을 길러 가자고 했다. 아내는 마침 약수가 떨어졌다며 좋아라 했다. 약수터에서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상황을 고백하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내는 울고불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괜찮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말자’며 여러가지 희망적인 말로 나를 위로해 주었다. 아내의 담대함에 큰 위로를 받았다. 정말 다행한 일이었다.
5월 16일, 박 교수님의 집도(執刀)로 개복(開腹)하고 종양(腫瘍) 제거 수술을 받았다. 국민학교 3학년 때인 1958년, 인천 도립병원에 가서 에테르로 전신마취를 하고 치질(痔疾) 수술을 받은 후 처음 받는 수술이었다. 수술의 전 과정이 힘들었지만 특히 수술 전에 받는 관장(灌腸)이 힘들었다. 관장은 항문에 호스를 꽂고 억지로 물을 역류시켜 세정하는 방식이었다. 관장을 담당하는 젊은 의사는 “아마 도중에 저를 죽이고 싶으실 겁니다’ 라며 각오를 단단히 하라고 귀뜸해 주었다. 관장은 세정한 물이 맑아질 때까지 반복되었다. 관장액에 온 몸이 젖어 추위에 벌벌 떨게 되고 나서야 관장이 끝났다. 이 때 그 의사의 사전 경고(?)는 고통을 참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때 그 의사께 감사드린다.
관장 후 전신마취 상태에서 개복 수술을 받았다. 수술 후 마취에서 깨어나 수술부위를 굽어보니 가슴에서 배꼽까지 봉합된 부위가 정말 끔직하였다. 보통 그렇게 하는 거겠지만, ‘아무리 남의 배지만 이렇게 험하게 째고 꿰매 놓을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다행히 수술은 잘 되었고 종양 크기도 작다고 했다. 다만 암 부위가 항문에서 너무 가까워 항문을 살리지 못 했는데 그것은 나중에 복원수술을 하면 된다고 했다. 그래서 인공항문(人工肛門)을 달고 지내게 되었다.
종양 크기가 작다고 해서 수술 후 며칠 동안은 크게 불안해하지 않고 지낼 수 있었다. 그때 인공항문용 제품을 판매하는 회사 직원들 (주로 여성)이 수시로 입원실에 들어와 내 인공 항문을 들여다보고는 “참 예쁘게 만들어졌네요” 하고는 자기 회사 제품을 선전하였다. 내 상황이 이런데 ‘인공 항문이 예쁘다고?’ 그들의 맹렬한 영업 태도에 어이가 없었다.
며칠 후 종양 부위 및 림프에 대한 조직 배양 검사 결과가 나왔는데, 암의 진행 정도가 ‘phase 3 B’라는 것이었다. 3기 중반이라는 뜻이라고 했다. 나와 동갑인 박교수님은 ‘우리 나이(만 47세)가 암세포 증식이 활발한 나이라 상황이 더욱 좋지 않다’고 솔직하게 말해 주었다. 순간 온몸의 기(氣)가 양쪽 발가락을 통해 싹 다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기(氣)라는 것을 평생 처음 느껴 본 순간이었다.
그 후 병상에 누워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하나님을 믿지 않은 상태에서 이 상황을 맞았으면 어쩔 뻔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을 믿는 상태에서 이 상황을 맞았다는 사실이 큰 위로가 되었다. 그후 신기하게도 죽을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잠을 못 자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불안감보다 나를 더 괴롭혔던 것은 당장 방귀가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박교수님은 그 상황에서 내 콧줄을 빼 주셨는데 그 바람에 창자가 방귀에 부풀어 배가 더 아팠다. 시사프리드(cisapride)를 투여해 봐도, 그리고 봉합 부위 실밥이 튿어질 때까지 병동의 복도를 뛰어다녀봐도 방귀는 소식도 없었다. 수술받은 지 얼마 안된 내가 쏜살같이 뛰어다니는 모습에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부러움을 금치 못 하였다. 실로 괴로운 나날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