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개발을 위한 투자는 리스크 부담이 매우 높은 일로 손꼽혀 왔다.
특히 항암제 분야의 경우 R&D 투자를 늘린다고 해서 획기적인 신약의 개발로 귀결될 수 있을는지는 차후의 추이를 지켜보아야 할 대목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화이자社만 하더라도 현재 항암제 개발에 두 번째로 많은 R&D 비용을 투자하고 있음에도 불구, 장차 이 회사가 항암제시장을 호령하는 메이커로 발돋움할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이다.
물론 한켠에서 희망의 싹도 움트고 있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화이자는 백혈병을 적응증으로 하면서도 '글리벡'(이마티닙)에 저항성을 보이는 환자들을 겨냥한 새로운 항암제를 개발 중이어서 관심이 쏠리게 하고 있다.
올해 말경 FDA에 허가신청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되는 이 항암제에 대해 선트러스트 로빈슨 험프리 증권社의 버트 헤이즐렛 애널리스트는 "다른 적응증이 몇가지만 추가될 경우 이 항암제가 장차 한해 8억~10억 달러의 매출을 올릴 수 있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와이어스社는 내년 중으로 새로운 신장암 치료제의 허가절차를 밟을 계획으로 있다.
노바티스社의 경우 올해 말 또는 내년 초에 결장직장암 치료제 신약에 대한 허가신청서를 FDA에 접수시킨다는 복안이다. 머크&컴퍼니社 또한 올해 안으로 새 자궁암 치료제의 허가신청을 추진하고 있다.
최근들어 항암제 분야가 미국系 메이저 제약기업들의 격전장으로 떠오르고 있다. 항암제 개발에 앞다퉈 투자를 늘리는 거대 제약기업들이 속출하고 있기 때문.
이에 따라 예전같으면 브리스톨 마이어스 스퀴브社(BMS)나 아스트라제네카社의 주특기 과목 정도로 인식되었던 항암제시장에 최근 2~3년 새 글락소스미스클라인社, 머크&컴퍼니社, 와이어스社, 쉐링푸라우社 등 신선한 얼굴들이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이들은 소규모 메이커나 항암제 전문업체들을 인수하거나, 라이센싱 제휴계약의 체결, 인력충원과 연구시설의 보강 등을 통해 항암제 분야에 새삼 명함을 내밀고 있다.
그 이유에 대해 해당 제약업체 관계자들은 "인간게놈의 해독 등 기술적 진보에 힘입어 유망 항암제 후보물질들이 속속 나타나고 있는 데다 고가(高價)를 보장받을 수 있고, 상대적으로 치열한 경쟁에 대한 부담이 적어 높은 수익을 올릴 수 있기 때문"이라는데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단적인 사례로 꼽히는 항암제가 지난 2001년 발매된 노바티스社의 만성 골수성 백혈병 및 위장관암 치료제 '글리벡'!
'글리벡'은 환자 1인당 월 2,450달러(도매공급가 기준)의 비용이 소요되는 "돈먹는 약"이어서 노바티스는 지난해 이 제품으로만 16억 달러의 매출을 창출했다.
BMS와 임클론 시스템스社(ImClone)의 결장직장암 치료제 '에르비툭스'(세툭시맙)는 이 보다 더욱 값이 비싼 편이어서 환자 1인당 월 1만8,000~40,000달러가 들어가는 부르주아型 항암제이다. 블록버스터 드럭 반열에 올라서는 일도 시간문제로 평가받고 있다.
프리드먼, 빌링스&램지 증권社의 데이비드 모스코위츠 애널리스트는 "제약기업들이 고가가 보장되는 항암제 분야에 상당한 매력을 느낄 수 밖에 없을 것"이라며 "시장볼륨이 적은 '글리벡'과 '에르비툭스'가 많은 이득을 해당 제약사측에 안겨주고 있는 현실은 그 이유를 충분히 설명해 주고도 남는 사례들"이라고 말했다.
와이어스社의 항암제 임상연구 담당부회장을 맡고 있는 리 F. 앨런 박사는 "휴먼게놈의 해독 이후로 암에 대한 이해도가 크게 향상됐다"며 항암제 분야에 큰 관심을 갖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지금까지 와이어스가 발매 중인 항암제는 단 2종에 불과했었다. 그런데 이 회사는 2년 6개월쯤 전 매사추세츠州 캠브리지에 항암제 개발에 주력할 R&D센터를 오픈했다. 이 센터는 항암제 개발의 효율성을 크게 끌어올려 어느덧 13개에 달하는 항암제 후보신약들의 임상시험이 '현재진행형'이다. 3년 전에 비하면 3배나 급증한 수치.
글락소스미스클라인社도 지난 2000년 통합을 거쳐 거듭 탄생했을 당시 항암제는 2개가 고작이었다. 지금은 개발 중인 항암제만 8종에 이른다.
그러나 와이어스社와 글락소스미스클라인社도 머크&컴퍼니社에 비하면 명함을 내밀기 어려울 것이라는 지적이다. 원래 항구토제로 개발되었지만, 항암화학요법제 투여시 뒤따르는 구토 증상을 억제하는 용도로 사용되고 있는 '이멘드'(아프레피탄트)를 제외하면 아예 항암제가 전무했던 곳이 이 회사이기 때문.
머크&컴퍼니社와 같은 메이저 제약사가 항암제는 전무했다는 것은 아이러니컬한 현실로 비쳐지기도 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최근 18개월 사이에 항암제에 주력해 온 BT 메이커 에이튼 파마社(Aton)를 인수했는가 하면 역시 이 분야가 주전공인 소규모 업체 2곳과 제휴계약을 통해 또 다른 항암제 후보신약들을 확보했다.
이 회사의 스티븐 H. 프렌드 부회장은 "이제 암세포 전체를 스캔하는 방식으로 발생한 특정변이를 낱낱이 관찰할 수 있게 된 데다 어떤 약물이 해당암을 치료하는데 최적의 것인지도 상당정도 예측이 가능케 됐다"고 말했다.
따라서 항암제 후보신약을 임상단계에 진입시키기까지 2~5년이면 충분해졌다는 것. 불과 2~3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5~10년이 걸렸던 것에 비하면 격세지감이자 일취월장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 프렌드 부회장의 설명이다.
이 같은 연구기간의 단축이 많은 제약기업들로 하여금 항암제 개발에 군침을 흘리게 하는 것은 당연지사라는 지적에 공감대가 확산되고 있다. 항암제 한 제품당 8억 달러를 상회하는 것으로 추정되어 왔지만, 상당한 수준의 비용절감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이유.
무엇보다 다른 다빈도 질환들에 비해 시장규모가 협소하다는 태생적 한계를 지닌 항암제 분야에 연구기간 단축과 R&D 비용절감이 주는 메시지는 겉봉을 뜯어보지 않아도 훤히 내용을 짐작할 수 있는 서한과 마찬가지라는데 전문가들의 코드가 일치하고 있다.
이제 항암제 개발은 엄청난 R&D 비용투자를 전제로 하는 제약업계 내부에서 그래도 돈이 덜 들어가는 분야로 상황이 사뭇 달라졌다는 진단이 내려지고 있다.
요사이 화이자社는 다른 다빈도 질환을 겨냥한 후보신약의 경우 평균 1,000~5,000명의 피험자들을 대상으로 임상 3상을 진행하고 있다. 그러나 항암제의 경우에는 임상 3상에서조차 400명 남짓한 자원자들만 참여시켜도 충분하다고 한다.
FDA도 최근들어서는 암을 비롯한 치명적인 질병들의 경우 임상시험의 규모축소를 허용하고, 허가절차를 신속하게 진행하면서 부담을 덜어주고 있다. 보완적인 의미에서 일단 허가를 결정한 후 추가연구를 요구하고 있을 뿐이다.
노바티스社에서 임상시험 부문을 총괄하고 있는 외르크 라인하르트 박사는 "치료대상을 특정범위로 국한시킬 수 있어 훨씬 효율적인 마케팅이 가능하다는 점도 항암제의 또 다른 매력요인"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