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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의회 청문회에서 글로벌 제약사 임원들이 최근 연구개발(R&D) 투자를 잇따라 중단한 배경을 공개하며, 영국의 생명과학 혁신 환경이 갈수록 “도전적”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이번 사태는 영국이 오랫동안 자부해 온 글로벌 제약 허브로서의 위상이 흔들리고 있음을 보여주며, 향후 투자 유치 전략 전반에 중대한 과제를 던지고 있다.
사건의 도화선은 머크(Merck & Co.)였다. 머크는 13억 달러(약 1조 7천억 원) 규모의 런던 R&D 센터 설립을 취소하고, 프랜시스 크릭 연구소 내의 연구도 종료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결정은 단순한 경영 판단을 넘어 정치적 파급력을 키웠다. 해당 부지가 키어 스타머 총리의 지역구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
머크 영국·아일랜드 법인 대표 벤 루카스(Ben Lucas)는 의회에서 “이번 철회는 과학적 성과나 연구의 질과는 무관하며, 영국 전반의 상업적 환경이 원인이 됐다”고 강조했다.
산업계의 반발은 정부의 약가 환급 제도 개편과 직결돼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영국 정부는 최근 신약 매출에서 제약사가 환급해야 할 비율을 기존 15.5%에서 31.3%로 두 배 이상 올렸다. 이는 NHS(국민보건서비스)의 재정 부담을 완화하려는 목적이지만, 업계는 혁신 투자 동기를 저하시킨다고 지적한다.
루카스는 “개발에서 상용화까지 이어지는 전 과정에서 영국의 운영 환경은 반드시 개선돼야 한다”고 말했다.
머크에 이어 아스트라제네카(AstraZeneca)도 케임브리지 연구소에 대한 2억 파운드(약 3700억 원) 투자를 중단했다.
톰 키스-로치(Tom Keith-Roach) 아스트라제네카 영국법인 사장은 청문회에서 “이번 결정이 유출돼 조직 내부에 큰 충격을 주었다”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그는 “영국은 지난 20년 동안 점점 혁신을 추진하기 어려운 환경으로 변해왔다”며 “글로벌 차원에서 R&D와 제조 투자는 점점 혁신을 존중하는 국가로 이동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아스트라제네카는 자국 대표 제약사라는 상징성을 가진 만큼, 이번 결정은 영국 내 제약 생태계 전반에 더욱 큰 위기의식을 불러왔다.
머크와 아스트라제네카 외에도 일라이 릴리(Eli Lilly)가 영국 내 바이오텍 인큐베이터 설립 계획을 보류했다. 릴리 측은 “영국 생명과학 환경에 대한 명확성이 확보될 때까지 투자 결정을 미루겠다”고 밝혔다.
글로벌 분석가들은 글로벌 상위 제약사들이 연이어 비슷한 결정을 내린 것은, 영국이 더 이상 안정적인 투자처로 인식되지 않고 있음을 방증한다고 설명했다.
산업계는 영국 정부와의 대화 재개를 거듭 요구했다. 영국제약산업협회(ABPI) 리처드 토벳(Richard Torbett) 회장은 “정부와 협상을 재개해 지속 가능한 해법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스트라제네카의 키스-로치 역시 “업계는 일부 고통을 감수할 준비가 돼 있지만, NHS 약가 정책과 혁신 투자 확대를 위한 명확한 장기 계획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번 사태는 단순히 특정 기업의 철수가 아니라, 영국이 글로벌 제약 혁신 허브로서 매력을 상실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현재 미국과 유럽 주요 국가들은 혁신 의약품에 대한 투자 유인을 강화하고 있으며, 아시아 시장 역시 연구 인프라 확대와 규제 완화를 통해 투자를 적극 유치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영국이 정책 리스크를 해소하지 못하면 글로벌 투자 흐름에서 점차 소외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제약산업은 장기간의 투자와 안정적 규제 환경이 필수적인 만큼, 정부와 업계가 공동의 해법을 마련하지 못하면 R&D 생태계가 위축되고 장기적으로 환자 접근성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것.
머크, 아스트라제네카, 릴리 등 빅파마의 연이은 R&D 투자 철수는 영국 생명과학 산업이 직면한 구조적 문제를 드러낸다. 약가 환급 제도 개편은 단기적으로 NHS 재정에 도움이 될 수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혁신 생태계와 국가 경쟁력을 훼손할 수 있다는 지적이 이어진다. 영국 정부가 정책적 불확실성을 해소하고 업계와의 장기적 파트너십을 구축하지 않는다면, 이번 사태는 단순한 일시적 충격이 아닌 글로벌 입지 약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