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해외 직접구매(이하 직구)와 병행수입 활성화를 선언하면서 국내 화장품업계가 술렁이고 있다. 직구가 빠르게 대중화되고 있는 현 상황을 고려할 때 정부의 이런 결정은 소비자들에게는 무척 반가운 일. 하지만 이로 인해 백화점 채널을 중심으로 한 수입 브랜드들은 직격타를 맞을 것이 확실하며, 국내 프레스티지 및 중견 브랜드 역시 적지 않은 영향을 받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정부는 지난 9일 현오석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주재로 열린 경제관계 장관회의에서 해외 직구 등 대안수입 활성화를 위한 ‘독과점적 소비재 수입구조 개선방안’을 확정했다. 관세청이 이날 공개한 10개 공산·가공품의 수입가와 국내 판매가를 보면, 일부 제품군은 판매가가 수입가 대비 10배가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같은 품목이더라도 저렴한 제품일수록 가격 격차가 컸다.
수입 유모차의 경우 비교적 저렴한 제품의 평균 수입가는 13만1,628원으로 조사됐지만, 국내 평균 판매가는 56만9,500원으로 수입가의 4.3배에 이르렀다. 립스틱은 차이가 더 벌어졌다. 수입 립스틱 가운데 가장 저렴한 쪽에 속하는 제품은 평균 1,423원에 수입돼 무려 14.9배가 높은 2만1,150원에 판매되고 있었다.
수입가와 판매가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이익은 백화점 등 유통업체가 30~35%로 가장 많이 가져가고 그 다음이 수입업체(30%), 공급업체(15~20%) 순으로 나타났다. 즉 백화점들이 수입품 가격 거품을 조장하면서 막대한 이익을 챙기고 있다는 의미다.
정부는 유통 경로를 다양화하는 방법으로 가격 거품을 제거, 수입품 시장을 좀 더 경쟁적으로 만들겠다는 전략이다. 병행수입 제품에 대한 소비자들의 불안감을 완화하기 위해 정부는 정상적인 통관을 거쳤다는 것을 확인해주는 통관인증제를 6월부터 확대 실시한다. 현재 통관인증제가 적용되는 품목은 의류·신발 등 236개인데 앞으로는 자동차부품과 소형가전, 화장품, 자전거, 캠핑용품 등 120여개 품목도 허용하기로 했다.
직구 절차도 간편해진다. 100달러 이하의 해외 직구 품목에 한해 통관 절차를 간소하게 줄여주는 목록통관제 대상도 6월부터 일부 식의약품을 제외한 소비재 전체로 확대하기로 했다. 특히 기존의 특별통관업체 지정을 폐지하고 세관장에게 신고만 하면 누구나 목록통관을 적용받을 수 있도록 규제가 완화됐다.
그러나 정부가 무조건적으로 길을 열어주는 것은 아니다. 병행수입으로 제품을 구입한 소비자들의 피해를 막기 위해 정부는 통관인증업체에 대한 사후관리 및 병행수입업자의 소비자 기만행위에 대한 모니터링을 강화하기로 했다. 아울러 병행수입협회 차원에서 공동 A/S 기반 구축 및 정보 제공을 확대하는 방안을 마련했다. 중소·영세업체의 참여 기반을 넓히기 위해 독점수입업자가 병행수입을 부당하게 저해하는 불공정행위에 대해서도 엄중 제재할 방침이다.
정부의 이런 정책에 대다수의 수입 화장품 브랜드들은 매우 조심스러운 입장을 보이고 있다. 할 말은 많더라도 정부가 적극 추진하기로 한 정책인 만큼 반기를 들기가 좀처럼 쉽지 않다는 얘기다. 실제로 본지의 취재 결과 주요 수입 화장품 브랜드들은 공통적으로 입장 표명을 유보했다.
한국투자증권의 시장분석 자료에 따르면 패션업계만큼 영향이 크지는 않지만 가격 인하가 불가피하다는 측면에서 화장품업계도 결코 긍정적인 변화는 아니라는 전망이다. 특히 수입 브랜드가 경쟁 심화로 판매 가격을 낮출 경우 이들과 경쟁하는 국내 프레스티지 브랜드 역시 전폭적인 가격 조정이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 국내 화장품시장은 영업이익이 해마다 줄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실제로 업체들이 받는 압박은 더욱 커질 것으로 보인다.
여영상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오프라인보다 싼 해외 직구의 규모가 확대될수록 백화점 실적은 큰 타격을 받게 될 것”이라며 “특히 세계 최대 온라인 유통업체인 아마존이 한국 시장에 진입하면 이러한 추세는 더욱 가속화될 것이 분명하다”고 진단했다.
또 한 화장품업계 관계자는 “국내 화장품시장의 유통 패러다임이 급격하게 변모하고 있는 상황에서 정부의 이번 발표로 또 하나의 변수와 직면하게 됐다”며 “직구 활성화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였던 만큼 트렌드 변화에 민첩하게 대응하는 업체들이 살아남는 제2의 적자생존 시대가 시작됐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