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 유수의 융숭한 대접을 받고 귀국한 장녕은 날마다 즐겁다. 친구들에게 자동선과 질펀한 방사 얘기부터 대동강 뱃놀이에서 흥미진진한 무용담을 털어 놓는 것이다. 그의 친구들은 대부분 한림학사다. 날마다 바쁜 일이 없으니 동정호(洞庭湖) 나들이가 일과다.

 

오늘은 장녕이 친구 서무(徐武·가명)·왕부(王傅·가명)·장문(張文·가명)·옥빈(玉嬪·가명)을 초청하여 조선 사신으로 가서 개성의 무용담을 털어 놓으려는 속내다.

제일 연장자인 왕부가 일찌감치 왔다. 장녕보다 두 살이 위다. “형님이 제일 먼저 오셨군요. 아랫것들은 늘 지각이에요? 오늘은 벌주를 마음껏 먹여야겠어요! 허허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저기 서무와 장문, 여자 친구 옥빈까지 함께 오고 있네요.” 장녕이 어느 때보다도 기분이 좋은 듯 싱글벙글 이다. “어 형님 오랜만이에요. 조선에 가서 재미를 톡톡히 보신 것 같네요? 얼굴이 환해요.” 막내 장문의 너스레다.

오늘 모임은 조선에 사신으로 갔다 온 보고 대화다. “장녕 오빠 오랜만이에요! 가끔 불러주세요. 혼자서만 재미 보시지 마시고... 섭섭해요. 오늘도 저만 쏙 빼고 초청을 하셨네요! 서무 오빠께서 같이 가자고 해서 왔어요. 불청객이라고 냉대는 하지마세요...” 옥빈이 미간을 찡그리며 편치 않은 속내를 감추었다.

옥빈은 장녕을 짝사랑하고 있다. 청혼을 했다가 일언지하에 거절을 당하고도 포기하지 않고 주위를 빙빙 맴돌며 서성댄다. 미녀에다 시재(詩才)까지 뛰어나 제2의 설도(薛濤)로 불리고 있다. 그런데 그녀가 천애고아다. 어디서 태어난 누구 자손인지 아무도 모른다.

옥빈 자신도 현재만 알고 있을 뿐 과거는 하얀 백지상태다. 장녕이 옥빈이 청혼해 오기 전에 먼저 마음에 들어 청혼을 하려고 신상을 알아보았으나 알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포기한 여인이다. 그런 이후로 장녕은 옥빈에게 마음을 접었다. 하지만 옥빈은 장녕과 달랐다. 끝까지 평생을 걸고 도전하려는 한(恨) 같은 태도다.

그들은 만나면 술 한 순배가 돌아가면 으레 시 낭송이 있다. 오늘은 홍일점 옥빈이 낭송을 맡았다. ‘예부터 들어오던 동정호 / 이제야 악양루에 올랐네. / 오나라와 초나라는 동남으로 갈라지고 / 천지만물은 밤낮으로 물위에 떠도는구나. / 친척과 벗은 편지 한 장 없고 / 늙고 병든 몸에 외로운 배 한척뿐이네. / 관산의 북녘은 한창 전란중이라 / 난간에 기대어 눈물만 흘리노라.’ 두보의 《악양루에 올라》다. 옥빈은 시 낭송 내내 눈물을 흘렸다.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옥빈의 눈물 때문이다. “자자, 술을 드시오! 옥빈여사께서 이 좋은날에 웬 눈물이요?” 장녕이 분위기를 추스른다. 장녕은 옥빈의 눈물의 뜻을 알고 있다. 하지만 둘 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라 서로 모르는 척 한다. 가슴은 활화산 같이 타오르고 있으나 의연한 모습으로 상대방에게 약점을 보이려 하지 않는다. 두 사람 모두 그러하다.

지독한 남녀다. 죽도록 사랑하면서 죽도록 속내를 보이지 않는 남과 녀다. 자기 마음을 자기만 알고 상대에게 보이지 않는 철저한 자기사랑주의자다. 하지만 동료들은 장녕과 옥빈이 떨어져서는 살 수 없는 연리지(連理枝) 관계이나 헤어져 살 수밖에 없는 관계를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척하여 당사자는 정말 모르는 줄 알고 있다.

지금도 그런 분위기다. 옥빈은 장녕을 보자 눈빛이 샛별처럼 빛난다. 장녕도 예외가 아니다. 두 눈빛이 부딪칠 때마다 천둥번개가 칠듯하지만 지축을 울리는 소리만 없을 뿐이다. 서무·왕부·장문은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척 딴전을 부리고 있다.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 그들이 덜 민망하도록 하려는 속 깊은 배려다.

옥빈은 한림학사는 아니지만 재색이 뛰어날 뿐만이 아니라 시문(時文)도 한림학자 못지않은 수준이다. 서무·왕부·장문·장녕의 모임엔 예외 없이 옥빈이 나타났다. 막내 서무와 오누이 관계를 맺어 장녕이 나타나는 모임엔 옥빈도 그림자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서무의 치밀한 작전이다.

지금은 그런 분위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둘만 남기는 작전 전개다. 오후가 되고 해가 뉘엿뉘엿 서산에 걸리자 술이 거나하게 취한 세 남자는 화장실에 갔다 온다는 구실로 한사람씩 자취를 감추었다. 결국 장녕과 옥빈 둘만이 남았다.

그들은 서무의 치밀한 작전이란 것을 눈치 채면서도 역시 모르는 척 하고 분위기에 휩싸인다. 장녕은 넷이 권하는 술에 만취상태다. 옥빈도 많이 마셨으나 여자 이태백 별명처럼 비교적 말짱한 상태다.

옥빈은 손수 거문고를 타면서 유우석(劉禹錫:7720~842)의 《동정호를 바라보며》를 낭송이 노래가 되었다. ‘가을 달빛 어지러진 호수 / 바람 잔 수면은 옥을 갈아 놓은 듯 / 멀리 동정산수 바라보니 / 하얀 은쟁반 위의 푸른 소라 하나’ 청아하고 맑은 옥빈의 목소리가 오늘따라 서글프게 악양루를 아침안개처럼 감싸 안았다.

옥빈의 노래가 끝나자 장녕이 고목처럼 벌러덩 자빠져 코를 드르렁드르렁 골기 시작하였다. 더운지 배를 드러내고 두 다리를 힘껏 벌리고 깊은 잠에 빠졌다. 옥빈이 용기를 내기로 하였다. 장녕을 자기 남자로 만들려는 속내다. 세 남자가 빠져나간 것은 옥빈에게 이런 기회를 만들어 준 것이다.

서무의 알뜰하고 치밀한 계획이다. 가위에 눌린 듯한 장녕은 두 팔을 벌려 허우적거린다. 그런데 무언가 손에 잡히는 것이 있었다. 눈을 뜬 장녕은 소스라치게 놀란다. 벌거숭이 옥빈이 위에서 교접을 하고 있다. “장녕씨 내 평생 처녀로 늙어 죽을 수는 없지 않은지요? 이렇게라도 해서 숫처녀를 면하려고 하니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옥빈은 사내 물건을 일으켜 옥문 깊숙이 넣어 절정의 기쁨을 즐기고 장녕의 기분은 아랑곳 않고 알몸인 채 밖으로 나갔다.

휘영청 밝은 달은 해무(海霧)로 자욱한 동정호를 신비한 선계(仙界)처럼 만들었다. 알몸의 옥빈이 해무 속으로 항아(姮娥)의 모습같이 걸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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