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황진이(黃眞伊) <제31話>

약업신문 편집부
2017-07-12 09:36

 

늦은 아침을 먹던 선비들이 무엇에 놀란 듯이 일제히 초당 쪽으로 몰려갔다. 초당 옆엔 화담 연못이 있다. 못의 동쪽으로 금강송이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으며 나무 밑엔 이름 모를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그리고 그 꽃들 중앙에 널따란 바위가 있다. 지금 그 바위 위에서 화담 스승이 학춤을 덩실덩실 추고 있는 것이다.


제자들이 그 모습을 보려고 몰려갔다. 화담이 학춤을 출 때엔 새 격물치지(格物致知)로 새로운 지식을 얻었을 때 기쁨을 못 이겨 추는 춤이다. 20평 남짓 넓이의 바위 위에서 하늘로 훌쩍 날아갈 듯 두 팔을 벌려 껑충껑충 뛰어 비상했다가 아래로 내려올 때에는 두 손을 흔들어 급격하게 떨어짐을 예방하기 까지 하였다. 흰 수염이 학의 깃털처럼 펄럭이었으며 나비 날개같이 금방 부서질 듯한 흰 옷들의 펄럭임이 학의 두 날개로 보였다.

진이가 맨 앞에 섰다. 선인(仙人)의 춤이다. 진이의 손에는 어느새 거문고가 들렸다. 손이 춤에 맞추어 현란하게 움직이었다. 화담의 학춤의 동작이 바뀔 때마다 거문고의 음률과 진이의 노래도 변화되었다. 흥에 겨워 춤에 몰입한 화담은 제자들이 모두 나와 춤을 구경하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을 게다.

화암(花岩:필지 작명) 주위엔 마치 병풍처럼 둘러있는 백양나무들로 앞이 확연히 내다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진이까지 나와 거문고를 타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을 장면을 상상도 못할 터다. 사실 화담은 진이가 자신의 문하로 들어오는 자체를 마뜩해 하지 않았다.

사내들이 모여 공부하는 곳에 홍일점이 들어오면 분위기 흐릴까 걱정이 앞서서다. 그것도 보통 여자가 아닌 천하의 재색(才色) 황진이가 아닌가! 그 같은 화담의 마음을 꿰뚫은 진이는 더욱 언행이 정제되었다.

평상시엔 오누이 같은 분위기의 허엽과 얘기를 주로 하며 스승과 대화엔 학문 외엔 입을 일체 다물었다. ‘시냇가 초가집에 한가로이 사노라니/달 밝고 바람 맑아 흥이 절로 난다./ 바깥손님 오지 않고 산새만 우짖는데/ 대 숲에 자리 옮겨 누워서 책을 본다.’ 고려 말 삼은(三隱:정몽주·이색)의 한 사람인 길재(吉 再·1353~1417)의 《뜻을 펴다》를 염두에 둔듯하다. 지금 학춤을 추고 있는 화담이 길재의 마음과 유사할 것이라고 진이는 보고 있는 것이다.

진이는 이따금씩 화담과 특정 주제에 대해 날카롭게 토론을 벌렸다. 그럴 때마다 화담은 귀찮다는 기색 없이 결론이 나올 때까지 상대하여 주었다. 그럴 때마다 화담의 표정엔 기쁨의 무지개빛이 얼굴 전체에 환하게 피어나기도 하였다. 여자라고 문하에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큰 후회를 할 뻔 했다는 표정이다.

한 번은 정치에 대해 물었다. 화담은 명분을 바로 잡아야 할 것이라 갈파하였다. 그는 개성이 다 다른 문하생들에게 그들의 학문에 맞춤옷 같이 학문의 세계를 가르쳤다. 배움에 뜻이 깊은 응길(應吉:홍인우 자字)에게는 《소학》(小學)을 논했고 화살 맞아 다친 새의 가련한 신세를 꼭 되갚아 주겠노라 안타까워한 태휘(太輝:허엽 자字) 한테는 《근사록》(近思錄)으로 마음을 다스리라 하였다.

화담은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뻔히 알면서도 멀찍이 떨어져 있으며 신선놀음을 즐긴 듯하다. 여러 번 출사할 기회가 있었으나 발을 들여 놓지 않았다. 속세의 물결에 물들지 않으려는 신선의 마음일 게다. 그는 잠시 옥황상제의 명을 받고 이승에 휴가 왔다 갈 신선이었을지도 모른다. ‘노니는 몸 하늘 가운데 있으니/ 걷는 발길에 구름안개 밟히네./ 신선공부 애쓸 것 없이/ 한가한 마음으로 세월 보내네.’ 화담의 《산놀이》를 불현 듯 떠올렸을 것이다.

화담은 때 묻지 않은 주기론의 비조(鼻祖)이며 조선 최고의 지성을, 진이 자신은 속세에 찌든 여인이라는 생각에 이르자 화담에 들어왔음이 후회되기도 하였다. 청정지대에 있는 유생(儒生)들에게 누가될까 온몸이 고슴도치처럼 움츠려 들었다.

그래서 진이는 허엽과 박지화 외에는 우연히 만나게 되면 고개를 끄덕 인사를 할 뿐 의도적으로 만나지 않았다. 하지만 허엽과 박지화는 진이가 밥 짓고 빨래하는 것이 안타깝다며 스스로 도와주어 어쩔 수 없이 눈만 뜨면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다. 허엽은 여섯 살 아래고 박지화는 두 살이 적다. 세속적이고 생물학적으론 서로 그리워 할 대상이다.

천하재색 진이가 제 발로 걸어 들어와 눈만 뜨면 볼 수 있는 거리에 있으니 이 얼마나 하늘이 준 기회가 아닐까? 진이 자신도 문득문득 욕정이 꿈틀댈 때면 허엽이 이사종으로 보이고 박지화는 벽계수로 보여 입술을 깨물며 마음을 진정 시킬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두 사내도 마찬가지다. 화암에 가서 빨래하는 진이를 보면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토해내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런데 그들은 서로 상대방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이 빙그레 웃음을 지어보였다.

양팔을 걷어붙이고 치마를 무릎까지 추켜올리고 빨래하는 진이의 모습을 멀찌감치 뒤에서 보고 있는 두 사내의 표정이다. 마음 같아서는 한걸음에 달려가 끌어안고 사내역할을 하고 싶을 게다. 그들은 진이의 유혹에 넘어가 30년 벽면 수도승 지족선사가 하룻밤 운우지락으로 파계하였다는 소식을 알고 있다.

헛기침을 서너 번 한 허엽이 “그만 내려갑시다. 내려갔다가 빨래가 다 되었을 즈음 다시 올라옵시다.”라고 말을 하면서도 그의 뜨거운 시선은 실팍한 진이의 엉덩이에 가 있었다. “예 그렇게 하시죠! 형님...” 박지화의 뜨거운 시선 역시 뭇 사내들의 욕망을 채워주었던 터질 듯 볼륨이 있어 보이는 엉덩이에서 아쉬운 시선을 거두며 허엽의 발길을 따랐다.

그렇게 진이는 가까이 하기엔 너무 뜨겁고 멀리 하기엔 너무 그리운 존재로 화담의 유생들 가슴을 휘어잡았다. 두 사내는 빨래하는 진이의 뒷모습을 목욕을 준비하는 알몸의 여인을 상상하며 운우지락을 즐겼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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