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약의 사용 기한

정재훈 약사
2019-01-16 09:16
▲ 정재훈 약사
추운 겨울 바깥에 나가기는 싫고 집에 있는 두통약을 찾고 나니 기한이 지난 것뿐이다. 이런 약 써도 되는 걸까. 고민과 갈등이 생긴다. 약에도 식품처럼 기한이 정해져 있다. 그런데 차이가 있다. 식품은 유통기한, 약은 사용기한이다.

유통기한이 지난 식품은 판매해서는 안 되지만 이미 집에 사둔 식품이 단지 유통기한만 지났다고 하여 버릴 이유는 없다. 상태가 온전하면 먹어도 된다. 하지만 약은 유통이 아니라 사용기한이다. 사용 기한이 지난 약은 판매도 할 수 없지만 사용해서도 안 되는 게 원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안 되느냐에 대해서는 많은 의문이 제기된다. 사용기한이 지난 약이라도 원래 효과를 유지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사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미국 FDA에서 미군의 의뢰를 받아 진행한 보관기간 연장프로그램(SLEP) 조사 결과가 있다.

약이 원래 포장 용기에 그대로 담겨있고 손을 대지 않은 상태일 때는 거의 평균 5년 반이 지나도록 전체 조사 대상의 88%에 달하는 약품이 약효를 유지했다. 사용기한을 원래보다 15년 이상 연장할 수 있는 약품도 있었다. 매년 폐기되는 약으로 인한 엄청난 비용을 줄여야 하는 미군에게는 희소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결과는 온도와 습도를 최적으로 유지한 저장 시설에서 보관한 경우에 한정된다는 문제가 있다. 즉, 일반 가정에서 보관하는 조건과는 거리가 있다. 게다가 소비자가 자신의 집에 보관 중인 약 가운데 어떤 약이 약효가 유지되고 어떤 약이 문제가 있는지도 알 수 있는 방법도 없다.

이를 깔끔하게 정리하는 연구 결과나 제도가 나오지 않는 이상, 다른 약을 도저히 구할 수 없는 긴급한 상황이 아니면 사용 기한이 지난 약은 쓰지 않는 게 좋다.

사용 기한이 지난 약을 복용하면 생기는 문제는 크게 보아 둘이다. 하나는 약의 효과가 떨어진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안전성 문제이다. 둘을 놓고 보면 약효가 떨어지는 게 더 흔한 문제다. 예를 들어 항생제의 역가가 떨어지면 질병의 원인균이 제대로 박멸되지 않으니 치료가 어려워진다.

습기에 약한 아스피린과 같은 약도 사용기한 지나면 효과가 떨어진다. 가끔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화장실 선반에 약을 보관하면 약성분의 가수분해가 촉진되어 약효가 더 빨리 줄어든다. 드물지만 사용기한이 지난 약의 안전성도 문제가 될 수 있다.

테트라사이클린, 아미노글리코사이드와 같은 일부 항생제는 사용기한이 지나면 변질되어 신장에 해로운 독성물질로 변할 수 있어 특히 주의가 필요하다. 이에 더해 약도 사용기한이 지나면 세균에 오염되거나 성분이 변질될 수 있다는 사실도 간과하지 말아야한다. 특히 시럽이나 서스펜션과 같은 액체 의약품의 경우 세균이 번식하여 또 다른 문제를 유발할 수 있으므로 과감히 버려야 한다.

약을 개봉해서 사용하면 사용기한이 줄어든다. 약에 표시된 사용 기한은 보통 1-2년 이상으로 긴 편인데, 이는 개봉하지 않고 그대로 보관했을 때의 사용 가능 기한이다. 개봉 후에는 기간이 단축된다. 특히 안약의 경우 개봉하면 1개월 내에 전부 사용하고 남은 것은 버려야 한다.

그렇지만 약에 따라 포장지에 인쇄된 사용기한까지 쓸 수 있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하나하나 블리스터팩에 개별 포장된 알약이나, 일회용으로 포장된 안약의 경우는 개봉하지 않은 것은 사용기한까지 두고 쓸 수 있다. (뚜껑을 열어서 사용한 일회용 안약은 바로 버려야한다.)

단, 이것도 보관상 주의사항을 제대로 지켰을 때의 이야기이다. (사용한 약의 보관 방법과 기간에 대해서는 지면 관계상 다음 편에 설명할 예정이다.)

사용기한이 지난 약들은 과감히 버리는 건 좋지만 그냥 쓰레기통에 버리면 안 된다. 아무렇게나 버려진 약은 환경에 큰 부담을 준다. 폐의약품을 오남용할 우려도 있다. 오래된 약은 약국이나 보건소에 있는 불용의약품 수거함에 버려야 한다.

아직까지 폐의약품을 수거하여 폐기하는 시스템이 체계적으로 운영되고 있지는 않아서 약국과 보건소의 고민이 많다. 더 많은 사람의 고민과 참여가 필요한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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