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사원 입사 유한양행 성장 견인 주역으로

“해주도립병원이 있는 토성역을 지날 때 약병을 전달해 주십시오.”

1934년 어느날 밤 황해도 해주도립병원에서 맹장수술을 받은 환자가 프랑스제 혈청주사약이 없어 죽어간다는 소식이 유한양행에 전해졌다. 

이에 당일 숙직사원은 “숙직자는 창고를 함부로 열어서는 안된다”는 사내규칙을 어기고 주사제를 꺼내 서울역으로 달려가 경의선 기관사를 찾아갔다. 

다음날 이 같은 사실을 알게 된 유일한 박사는 사규를 어긴 숙직사원을 나무라기는 커녕 원칙에 얽매이지 않고 더 높은 가치를 따라 사람의 목숨을 살렸다며 크게 칭찬했다고 한다.

그날 숙직사원이 바로 훗날 유한양행 사장에까지 오른 입사 2년차 새내기 홍병규였다.

1932년 경기상업학교를 졸업한 홍병규는 YMCA 빌딩에 세들어 있었던 유한양행이 신문로에 2층짜리 사옥을 짓고 이사한 직후의 시점이었던 이듬해 평사원으로 입사했다. 

홍병규는 입사 당시 30~40여명의 임직원들이 의약품 수입에 치중하면서 ‘안티푸라민’, ‘코푸시럽’, ‘네오톤’ 등 5개 제품들을 제조‧시판하는 정도였던 유한양행이 오늘날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제약기업으로 성장하는 데 견인차 역할을 한 중추적인 인물의 한사람이다. 

강점기에 일제(日帝)의 탄압으로 유한양행이 존폐의 위기에 처했을 때 극복하는 데 큰 힘을 보탰을 뿐 아니라 침착하고 치밀한 일처리로 1‧4 후퇴 이후 분산된 조직을 재편하고 회사를 되살리는 데도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실제로 그는 평생을 바쳐 유한양행에 재직하는 동안 전무이사, 감사, 대표이사, 부사장, 사장, 회장, 유한코락스 대표이사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제 1회 ‘약의 상’ 제약 부문을 수상자로 선정되어 1961년 10월 5일 제 5회 ‘약의 날’ 기념식 석상에서 수상할 당시에는 전무로 재직 중이었다. 

아울러 한국제약협회의 전신인 대한약품공업협회 부회장, 한국정밀화학공업진흥회 이사, 전국경제인연합회 이사 등 대외적인 활동도 활발하게 전개했다.

1975년 출시된 이후 1980년대 말까지 시장을 독점했던 ‘유한락스’를 개발해 선보인 장본인 또한 유한코락스(이후 유한크로락스로 변경) 대표이사로 재직할 당시의 홍병규였다는 사실은 빼놓을 수 없는 팩트이다.

다음은 ‘약업신문’ 1961년 10월 8일자 5면에 게재된 제 1회 ‘약의 상’ 수상자 프로필 기사 가운데 한 부분이다. (한자는 한글을 병기했음.)

“단결(團結)과 친화(親和)를 대내사시(對內社是)로 하고 우수제품(優秀製品)의 공급(供給)을 대외사시(對外社是)로 하는 유한양행(柳韓洋行)의 역사(歷史)와 함께 씨(氏)의 혼연(渾然)한 정성(精誠)은 자자영영(孜孜營營) 생활(生活)했으며 씨(氏)의 고난(苦難)은 유한양행(柳韓洋行)의 수난사(受難史)이기도 하였다. 이렇게 유한양행(柳韓洋行)과 씨(氏)는 끊을 수 없는 표리일체(表裏一體)의 관계(關係)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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